과학혁명의 구조/퍼즐 풀이로서의 정상과학 (발췌)
토머스 S. 쿤, 과학혁명의 구조 제4판 (까치글방, 2013), 4장 중에서
우리가 방금 살펴본 정규적인 연구 문제들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아마도 그들 연구가 개념적이거나 현상적인 주요 새로움을 얻어내는 것은 거의 목표로 하지 않는다는 점일 것이다. 일례로 파장의 측정에서 보면 그 결과의 가장 심오한 세부 내용을 제외하고는 어느 것이나 미리 알려진 것이며, 예상의 전형적인 폭이 약간 더 넓어질 따름이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경우에서조차도, 예상되는 결과들의 범위는 상상이 허용하는 범위에 비하면 언제나 소폭이다. 그리고 그 결과가 그 좁은 범위에 맞아떨어지지 않는 프로젝트는 대개 연구의 실패가 되는데, 그런 실패는 자연에 대해서가 아니라 그 과학자에 대한 것이다. ...
그러나 만일 정상과학의 목표가 실질적인 주요 혁신이 아니라면 — 예측된 결과의 근처에 이르지 못한 것을 일반적으로 과학자로서의 실패라고 한다면 — 도대체 어찌하여 이런 문제들이 다루어지는 것일까? ... 과학자에게는 적어도 정규적인 연구에서 얻어진 결과는 의미 있는 것인데, 그 이유는 그 패러다임이 적용될 수 있는 범위와 정확성에 보탬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 대답은 과학자들의 정상적 연구의 문제들에 대해서 드러내는 열성과 헌신을 설명하지는 못한다. ... 그 결과가 예측될 수 있는, 그것도 흔히 아주 상세하게 예측되는 까닭에 미지의 것으로 남겨지는 자체가 별 흥미 없는 경우라고 할지라도 그 결과를 성취하는 방법은 의문 속에 남게 된다. 정규의 연구 문제를 결론으로 몰고 가는 것은 새로운 방법으로 예측 결과를 이끌어내는 것이며, 그것은 갖가지 복합적인 기기적, 개념적 그리고 수학적 퍼즐 풀이를 요구한다. 이것을 해내는 사람은 퍼즐 풀이 선수로 밝혀지며, 퍼즐의 도전은 과학자로 하여금 지속적인 연구를 수행하게 하는 무엇인가의 중요한 요소가 된다.
‘퍼즐’ 그리고 ‘퍼즐 풀이자’라는 용어들은 앞의 단락에서 점진적으로 뚜렷해졌던 주제들의 몇 가지를 강조시킨다. 퍼즐은 여기에서 적용된 완전한 표준적 의미로서, 풀이에서의 탁월성이나 풀이 기술을 시험하는 구실을 할 수 있는 문제들의 특이한 범주를 말한다. 사전적 설명으로는 ‘직소 퍼즐’과 ‘십자 퍼즐’이고, 이것들은 여기서 우리가 구별해야 하는 정상과학의 문제들과 공통된다는 것이 특성이다. 그중 한 가지는 방금 언급된 것이다. 퍼즐의 결과가 본질적으로 흥미로운 것이냐 또는 중요한 것이냐는 좋은 퍼즐을 가리는 기준이 아니다. 오히려 대조적으로 참으로 급박한 문제들, 이를테면 암 치료라든가 평화를 영속시키는 계획 같은 것은 전혀 퍼즐이 아닌 경우가 많다. 대체로 그 이유는 그런 문제들은 그 어떤 해답도 가지고 있지 않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두 가지 다른 종류의 직소 퍼즐 상자 속에서 멋대로 조각들을 꺼내어 그림을 맞춘다고 생각해보자. 그런 문제는 아무리 솜씨 좋은 사람일지라도 별도리가 없는 까닭에, 그것은 풀이에서의 재주 테스트는 될 수가 없다. 통상적인 의미로 보면 그것은 전혀 퍼즐이 아니다. 본질적 가치는 결코 퍼즐에 대한 기준이 되지 못하지만, 확실히 해답이 존재한다는 것은 그 기준이 된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앞에서 과학자 사회가 패러다임에 의존하여 획득하는 것들 가운데 하나는, 패러다임이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는 동안 풀이를 가진 것으로 가정될 수 있는 문제들을 선정하는 기준이라는 것을 보았다. 대부분 이들 문제들은 그 과학자 사회가 과학적이라고 인정하거나 또는 그 구성원들에게 참여하라고 권장하게 될 유일한 문제들이 된다. 이전에는 표준으로 되어 있었던 다수를 비롯하여 다른 문제들이 탁상공론이라거나 다른 분야에서의 관심사라거나 또는 시간 낭비일 정도로 너무 말썽이 많다고 하여 거부당하게 된다. 이런 점 때문에 하나의 패러다임은 그 과학자 사회를 사회적으로 중요한 퍼즐 형태로 환원될 수 없는 문제들로부터 격리시키기까지 한다. 이는 그런 문제들은 그 패러다임이 제공하는 개념적, 기기적 수단을 써서 진술될 수가 없기 때문이다. ... 정상과학이 이렇게 급속도로 진전되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전문가들이 그들 자신의 재능 결핍만이 문제 해결을 가로막는 그런 문제들에 집중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만일 정상과학의 문제들이 이런 의미에서 퍼즐이라고 한다면, 어째서 과학자들이 정열과 헌신을 가지고 그런 문제들을 공략하는가의 이유를 물을 필요가 없어진다. 인간이 과학에 흥미를 느끼는 데에는 갖가지의 이유들이 있다. 그 가운데는 유용성의 욕구, 새로운 영역을 탐사하는 경이감, 질서를 찾아내려는 희망, 이미 정립된 지식을 시험하려는 요구 등이 포함된다. 이러한 동기와 다른 동기들 역시 이후에 그 사람이 다루어야 할 특수 문제들을 결정짓는 데에 도움을 준다. 물론 경우에 따라서 결과는 낭패를 보기도 하지만, 이와 같은 동기들이 일차적으로는 과학자의 관심을 유발하고, 그 다음에는 그를 이끌어나가게 되는 충분한 이유가 된다. 전반적으로 과학 활동은 유용하다고 판정되는 일이 잦으며,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고 질서를 만들어내고, 오랫동안 받아들여진 믿음을 시험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규 연구 문제에 종사하는 개인으로서는 이들 유형의 활동은 하나도 하고 있지 않다. 일단 과학에 몸담게 되면 과학자의 동인은 상당히 다른 양상을 띤다. 그 다음 그에게 도전하는 것은, 그가 만일 충분히 재능이 있다면 이전에 아무도 풀지 못했거나 제대로 잘 풀지 못했던 퍼즐을 푸는 데에 성공할 것이라는 확신이다. 가장 위대한 과학적 정신의 대가들은 대개 이런 종류의 미해결 퍼즐에 대한 전문가로서 헌신해왔다. 거의 모든 경우에, 세분화된 어느 특수 분야건 간에 그밖의 다른 할 일은 아무것도 없는데, 이는 정통의 숙련된 연구자에게는 그것을 상당히 매혹적인 것으로 보이게 만드는 하나의 사실이다.
이제부터는 논의를 바꾸어서, 퍼즐들과 정상과학의 문제들 사이의 유사 관계에서 좀더 까다롭고 보다 잘 드러나는 측면을 살펴보자. 만일 퍼즐로서 분류되는 것이라면, 하나의 문제는 그 해답이 확실이 있다는 것 이상의 특성을 지녀야 한다. 거기에는 또한 인정받을 수 있는 해답의 본질과 그것들이 얻어지는 단계를 모두 한정짓는 규칙도 존재해야 한다. 이를테면 직소 퍼즐을 완성하는 것은 단순히 “하나의 그림을 만드는” 일이 아니다. 어린이거나 또는 당대의 예술가라면 어떤 우중충한 배경에다가 골라낸 조각들을 추상적인 형태로 흩어놓아 그림을 만들 수도 있다. 그렇게 만들어진 그림은 원래 조각 맞추기로 만들어진 것보다 더 근사할는지도 모르며, 더욱 독창적일 것임은 말할 나위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그림은 해답이 아닐 것이다. 해답을 구하려면 모든 조각을 다 써서 맞춰야 하고, 그림 없는 쪽은 바닥으로 면해야 하며, 그리고 모두 꼭 맞게 끼워서 빈틈이 하나도 없어야 한다. 이런 것들은 직소 퍼즐의 풀이를 다스리는 규칙들에 포함된다. 십자 퍼즐, 수수께끼, 장기 등의 문제들의 허용 가능한 해답을 끌어내는 데에도 그와 비슷한 제한 조건들이 쉽사리 발견된다. ...
과학혁명의 구조 목차
- 서론 : 역사의 역할
- 정상과학에 이르는 길 (2-5장 발췌)
- 정상과학의 성격
- 퍼즐 풀이로서의 정상과학 (발췌)
- 패러다임의 우선성
- 변칙현상 그리고 과학적 발견의 출현 (발췌)
- 위기 그리고 과학 이론의 출현
- 위기에 대한 반응
- 과학혁명의 성격과 필연성 (번역)
- 세계관의 변화로서의 혁명 (발췌)
- 혁명의 비가시성
- 혁명의 완결 (발췌)
- 혁명을 통한 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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