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혁명의 구조/세계관의 변화로서의 혁명 (발췌)
토머스 S. 쿤, 『과학혁명의 구조』 (까치글방, 2013), 234-241쪽(12장의 일부).
돌턴과 그 당시 학자들의 연구를 살펴보면, 우리는 하나의 동일한 조작이 다른 패러다임을 통해서 자연에 연결될 때에는 자연의 규칙성의 전혀 다른 측면에 대한 지표가 될 수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덧붙여서 우리는 낡은 조작 방법이 종종 그 새로운 역할 속에서 상이한 구체적인 결과를 낳는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18세기 대부분의 기간 동안과 19세기에 들어서까지도 유럽 화학자들은 거의 보편적으로 모든 화학종을 이루는 기본 원자들은 상호간의 친화력에 의해서 결합된다고 믿었다. 그리하여 은덩어리는 은의 입자들 사이의 친화력 때문에 한데 뭉친 것이었다(라부아지에 이후까지 이러한 입자들은 그것보다 더 기본적인 알갱이들로부터 결합되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바로 이 이론에 의하면, 은이 산에 녹는 (또는 소금이 물에 녹는) 이유는 산의 입자들이 은의 입자들을 (또는 물의 입자들이 소금의 입자들을) 물질 입자 상호간에 잡아끄는 것보다 더 강하게 끌어당기기 때문이었다. 또한 구리와 산 사이의 친화력이 은에 대한 산의 친화력보다 컸기 때문에, 구리는 은 용액에 녹아서 은을 침전시킨다고 생각되었다. 그 밖의 다수의 현상들이 이와 같은 방식으로 설명되었다. 18세기 동안 선택적 친화력 이론은 훌륭한 화학 패러다임으로서, 화학 실험법의 설계와 분석에 광범위하게, 그리고 때때로 성공적으로 적용되었다.
그러나 친화력 이론은 돌턴의 연구로 동화한 이래로는 이상스럽게 보이는 방식으로 물리적 혼합물과 화학적 화합물을 구분했다. 18세기의 화학자들은 두 종류의 과정을 인식했다. 이들은 혼합에 의해서 열, 빛, 발산 그리고 그 비슷한 무엇인가가 일어날 때, 화학적 결합이 발생하는 것으로 보았다. 다른 한편, 혼합물의 입자들이 육안으로 또는 기구를 써서 분리, 구분될 수 있는 경우, 그것은 단지 물리적인 혼합물이라고 간주되었다. 그러나 중간적 성격의 수많은 경우들, 예를 들어 물에 녹은 소금, 합금, 유리, 대기 중의 산소 등에는 이런 어설픈 기준은 거의 쓸모가 없었다. 자신들의 패러다임에 의해서 인도되면서, 대부분의 화학자들은 이 모든 중간 영역을 화학적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는 그것을 구성하는 과정들이 모두 같은 종류의 힘에 의해서 지배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물속의 소금이나 질소에 섞인 산소는, 구리를 산화시켜서 얻는 결합과 마찬가지의 화학적 결합의 한 실례로 여겨졌다. 이처럼 용액을 화합물로 간주하는 견해는 매우 완강했다. 친화력 이론은 그 자체로서 잘 입증되었다. 게다가 화합물의 생성은 용액에서 관찰되는 균질성을 설명해주었다. 예를 들면, 만일 산소가 공기 중에서 결합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그저 섞여 있기만 한 것이라면 보다 무거운 기체인 산소는 바닥으로 가라앉아야 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공기를 혼합물이라고 보았던 돌턴은 산소가 바닥으로 가라앉지 않는다는 사실에 대해서 만족스럽게 설명할 수가 없었다. 그의 원자론으로의 동화는 궁극적으로 이전에는 아무 변칙도 존재하지 않았던 곳에 변칙현상을 탄생시킨 것이었다.
사람에 따라서는, 용액을 화합물이라고 보았던 화학자들이 그들의 후계자들과 달랐던 점은 단지 정의에 관한 문제였을 뿐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그랬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의미는 정의를 단순히 규약적인 편의로 만들어버리는 그런 것은 아니다. 18세기에는 혼합물과 화합물이 조작상의 실험에 의해서 완전히 구별되지 않았으며, 아마도 그럴 수도 없었을 것이다. 화학자가 그러한 검증을 모색했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용액을 화합물로 만드는 기준을 추구했을 것이다. 혼합물-화합물의 구분은 그들의 패러다임의 일부였고, 그들이 연구 영역 전체를 보았던 방식의 일부였다. 그것은 화학의 누적적 경험 전체보다 우선하지는 않았으나, 어느 특정 실험적 검증보다는 선행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화학이 이런 방식으로 생각되었던 동안에, 화학적 현상들은 돌턴의 새로운 패러다임에 동화되면서 나온 법칙과는 다른 법칙들을 예시하고 있었다. 특히 용액이 여전히 화합물이라고 생각되던 동안, 그렇게 많았던 화학 실험은 그 자체로서 일정 성분비의 법칙을 내놓을 수가 없었다. 18세기 말에는 몇몇 화합물들이 그 구성성분들의 무게로 볼 때, 성분비가 통상적으로 일정하다는 사실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몇 가지 종류의 반응에 대해서 독일 화학자 리히터는 현재의 화학 당량의 법칙에 포함되는 보다 진전된 규칙성까지도 주목하고 있었다. 그러나 제조법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어떤 화학자도 이런 규칙성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으며, 거의 18세기 말 이전까지는 아무도 그 규칙성을 일반화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유리나 소금 수용액에서처럼 확실한 반대 실례들이 주어진 상황에서, 친화력 이론을 폐기하면서 화학자들의 영역의 범위를 재개념화하지 않고서는 일반화란 도대체 불가능한 것이었다. 18세기 말에 이르러서 프랑스 화학자 프루스트와 베르톨레 사이의 유명한 논쟁에서 그 결과는 뚜렷하게 드러났다. 전자는 모든 화학 반응이 일정 성분비로 일어난다고 주장한 반면, 후자는 그렇지 않다고 맞섰다. 두 사람 모두 자신의 견해에 대한 설득력 있는 실험적 증거를 수합해놓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의 주장은 서로 엇갈릴 수밖에 없었고, 그들의 논쟁은 전혀 결론이 날 전망이 없었다. 베르톨레가 성분비 면에서 달라질 있는 하나의 화합물을 보았던 곳에서 프루스트는 단지 물리적인 혼합물만을 보았기 때문이다. 이 논쟁에는 실험도, 정의상 관계의 변화도 아무 의미가 없었다. 갈릴레오와 아리스토텔레스가 그러했던 것처럼, 두 사람은 서로 근본적으로 엇갈려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존 돌턴이 마침내 그의 유명한 화학적 원자론으로 이끌게 된 연구를 수행하던 시절의 상황이었다. 그러나 그런 연구의 최후 단계에 이르기까지, 돌턴은 화학자도 아니었고 화학에 관심도 없었다. 오히려 그는 물에 의한 기체의 흡수와 대기에 의한 수분의 흡수라는 물리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었던 기상학자였다. 다른 전공 분야에서 훈련을 받으면서 더러는 그 전공에 대해서 스스로 수행한 연구 때문에, 그는 이러한 문제들에 당시의 화학자들과는 상이한 패러다임을 가지고 접근했던 것이다. 특히 그는 기체의 혼합물이나 물이 기체를 흡수하는 과정을 친화력이 전혀 작용하지 않는 물리적 과정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그에게 용액의 관찰된 균질성은 하나의 문젯거리였으나, 그는 실험에서 혼합물 속의 다양한 원자들의 상대적 크기와 무게를 결정할 수 있다면 그 문제가 풀릴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돌턴이 결국 화학으로 돌아선 것은 이들의 크기와 무게를 결정하기 위해서였고, 그는 처음부터 그가 화학적이라고 여겼던 반응들의 제한된 영역에서 원자는 1:1이나 다른 간단한 정수비로만 결합될 수 있다고 가정했다. 이 자연스러운 가정은 그로 하여금 기본 입자들의 크기와 무게를 결정하는 것을 가능하게 했으나, 일정 성분비의 법칙을 동어반복으로 만들었다. 돌턴에게는 성분이 일정한 비율로 대입되지 않는 반응은 그 어느 것도 사실상 순수한 화학적 과정이 아니었다. 일단 돌턴의 연구가 받아들여지자, 그의 연구 이전에 실험으로 확립될 수 없었던 법칙이 어떠한 화학적 측정으로도 뒤엎을 수 없는 기본적인 원칙이 되었다. 어쩌면 과학혁명의 가장 완벽한 사례가 될지도 모르는 이 사건의 결과로서 동일한 화학적 조작이 화학적 일반화에 대해서 종전과는 전혀 다른 관련을 맺게 되었던 것이다.
말할 나위도 없이, 돌턴의 결론들은 처음 발표되었을 당시 여기저기서 공격을 받았다. 특히 베르톨레는 결코 설득되지 않았다. 이 주제의 성격을 고려하건대, 그가 설득되어야 할 이유도 없었다. 그러나 대다수의 화학자들에게, 돌턴의 새로운 패러다임은 프루스트의 패러다임이 미흡했던 부분에서 설득력을 가진 것으로 판명되었는데, 그 이유는 돌턴의 패러다임이 혼합물과 화합물을 구분하는 새로운 기준 이상의 보다 광범위하고 보다 중요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만일 원자가 간단한 정수비로만 화학적으로 결합하는 것이라면, 기존의 화학 데이터의 재검토는 일정 성분비의 법칙뿐만 아니라 배수비례의 법칙의 예증까지도 드러내줄 것이었다. 화학자들은 이제, 예컨대 탄소의 두 가지 산화물은 무게로 보았을 때 각각 산소 56퍼센트와 72퍼센트를 포함한다고 말하지 않게 되었다. 그 대신 그들은 무게 1인 탄소가 무게 1.3이나 2.6인 산소와 결합한다고 표현했다. 과거의 실험적 조작의 결과들이 이런 방식으로 기록되자, 곧 2:1이라는 비율이 눈에 띄게 되었다. 잘 알려졌던 여러 반응들과 그 밖의 새로운 반응들의 분석에서도 이런 관계가 나타났다. 게다가 돌턴의 패러다임은 리히터의 연구를 동화시키고, 완전히 일반화시키는 것을 가능하게 했다. 또한 그것은 특히 결합 부피에 대한 게이-뤼삭의 실험을 비롯한 새로운 실험들을 제안했고, 그런 실험들은 화학자들이 이전에는 꿈도 꾸지 못했던 다른 규칙들도 내놓게 했다. 화학자들이 돌턴으로부터 취했던 것은 새로운 실험적 법칙이 아니라 화학을 수행하는 새로운 방식이었고(그 자신은 그것을 “화학철학의 새로운 체계”라고 불렀다), 이것이 유용하다는 것이 매우 급속히 판명됨으로써 프랑스와 영국의 구식 화학자들 중 소수만이 그것에 저항할 수 있는 상황이 되었다. 그 결과 화학자들은 화학 반응이 이전과는 전혀 다르게 행동하는 세계에서 살게 된 것이었다.
이 모든 일들이 진행됨에 따라서 한 가지 전형적이고도 매우 중요한 다른 변화가 발생했다. 여기저기서 숫자로 표시되는 화학의 데이터, 바로 그것이 변하기 시작한 것이다. 돌턴이 처음에 그의 물리 이론을 뒷받침할 데이터를 찾기 위해서 화학 문헌을 뒤적였을 때, 그 이론에 맞는 몇 가지 반응 기록을 발견했지만 이에 맞지 않는 다른 기록들을 발견하는 것도 피할 수는 없었다. 예컨대 구리의 두 가지 산화물에 대한 프루스트 자신의 측정은 원자론에 의해서 정해지는 2:1이 아니라, 1.47:1이라는 산소 무게비를 얻었다. 프루스트는 충분히 돌턴의 비율을 얻을 수 있었을 만한 인물이었다. 말하자면 그는 훌륭한 실험가였으며, 혼합물과 화합물의 관계에 대한 그의 견해는 돌턴의 것에 상당히 가까웠다. 그러나 자연을 하나의 패러다임에 맞추기는 어려운 일이다. 이것이 바로 정상과학의 퍼즐들이 왜 그렇게 도전적이며, 패러다임 없이 수행된 측정이 왜 그렇게 결론에 이르는 경우가 드문가를 말해주는 이유이다. 그러므로 화학자들은 증거를 바탕으로 간단히 돌턴의 이론을 수용할 수는 없었는데, 그 이유는 그 증거의 많은 부분이 여전히 부정적이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들은 그 이론을 받아들인 이후에도, 결국 거의 한 세대에 걸쳐서 자연을 두들겨서 줄을 맞추는 과정을 밟아야 했다. 이 작업이 이루어졌을 때에는 잘 알려진 화합물들의 백분율 조성비까지 달라졌으며, 데이터 자체도 변화되었다. 이것이 혁명 이후 과학자들이 상이한 세계에서 일하게 된다고 말하고 싶어할 수도 있는 마지막 의미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