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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머스 쿤, | 토머스 쿤, {{책|[[과학혁명의 구조]]}} 제4판 (까치, 2013), 1장 | ||
“만약 역사가 일화나 연대기 이상의 것들로 채워진 보고라고 간주된다면, 역사는 | “만약 역사가 일화나 연대기 이상의 것들로 채워진 보고라고 간주된다면, 역사는 우리가 지금 홀려 있는 과학의 이미지에 대해서 결정적인 변형을 일으킬 수 있을 것이다.”(61쪽) 여기서 말하는 “우리가 홀려 있는지 과학의 이미지”는 어디서 형성된 것이며 어떤 이미지를 말하는가? 그 이미지는 주로 과학 교과서에 의해 형성된 것으로, 거기에 등장하는 과학적 방법이란 단지 교과서 속 자료나 일반화를 얻게 해주는 실험적 조작 및 논리적 조작을 의미하기 마련이고, 과학은 그 교과서에 실린 사실, 이론, 방법들의 집합이 된다. 이러한 과학에 따르면, “과학자는 성공적이든 성공적이지 않든 간에 그 특정한 집합에 한두 가지 요소를 보태기 위해 온갖 애를 쓰는 사람이 된다. 과학의 발전은 과학적 테크닉과 지식을 이루면서 날로 쌓여가는 자료 더미에, 하나씩 또는 여러 개씩 이들 항목이 덧붙여지면서 차츰차츰 진행되는 과정이 된다. 그리고 과학사는 이러한 연속적인 누적과 이 누적을 방해한 [신화나 미신과 같은] 장애물의 연대기를 기록하는 분야가 된다.”(62쪽) 이러한 과학의 이미지를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누적(축적)에 의한 발전”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 ||
그러나 과학의 역사를 세밀히 들여다본 최근의 과학사학자들은 과학이 단순한 | 그러나 과학의 역사를 세밀히 들여다본 최근의 과학사학자들은 과학이 단순한 “누적에 의한 발전”으로 묘사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있다. 어떤 점에서 그러한가? 첫째로, 새로운 발견의 시점을 명확히 말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산소는 언제 발견되었는지, 에너지 보존을 처음 알아낸 사람은 누구인지 답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심지어 그런 질문 자체가 잘못된 질문일 수도 있다. 이러한 문제 때문에 쿤은 “아마도 과학은 개별적인 발견과 발명의 누적에 의해서 발달되는 것이 아닐 것”(23쪽)이라는 의심을 제기한다. 둘째로, 과거의 관찰과 믿음에서 “과학적인” 요소를 선대 과학자들이 “오류”와 “미신”이라 단언했던 것들과 구별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역학, 플로지스톤 화학, 칼로릭 열역학을 자세히 들여다볼수록, 그러한 견해가 오늘날 수용된 견해보다 덜 과학적인 것도 아니고, 오늘날보다 더 유별난 것도 아니다. 그러한 과거의 견해를 신화나 미신이라고 한다면, 오늘날에도 우리의 과학자들은 신화를 만들어내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반대로 그것을 과학이라고 부른다면, 과학에는 현재 우리가 과학으로 믿고 있는 것들과는 거리가 먼 것들까지 포함될 것이다.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한다면 무엇을 선택할까? | ||
쿤을 포함한 과학사학자들은 후자를 선택했다. “시대에 뒤진 이론들이 폐기되어버렸다는 이유로 | 쿤을 포함한 과학사학자들은 후자를 선택했다. “시대에 뒤진 이론들이 폐기되어버렸다는 이유로, 원칙적으로 비과학적인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선택은 과학의 발전을 누적의 과정으로 보기 어렵게 만든다.”(63쪽) 이제 과학사학자들은 과학의 누적인 발전을 포기하고 다른 질문을 던진다. “역사가들은 보다 옛 과학이 현재까지의 진보를 위해 베푼 영속적 기여를 따지기보다, 바로 그 당대에서 그 과학의 역사적인 온전성(historical integrity)을 드러내려고 애쓰고 있다.”(64쪽) 예를 들어, 갈릴레오에 대해 연구한다고 생각해보자. 역사가는 무슨 질문을 던질까? 갈릴레오가 현대 과학에 무슨 기여를 했는지 묻기보다, 갈릴레오의 견해가 정말 무엇이었으며, 그 견해가 당대의 지적 그룹들과 어떤 관련을 맺고 있었는지 묻는다. 특히 갈릴레오의 어떤 견해가 참이고, 다른 어떤 견해가 오류였는지 밝히는 것이 아니라, 그 시대에 살던 갈릴레오가 정말 어떤 생각을 품고 있었는지 묻는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매우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한 것처럼 보이는 것에서 과학사학자들은 겉으로는 잘 드러나지 않는 갈릴레오 머릿속의 정합성을 드러내어 보여주기도 한다. (예를 들어, 갈릴레오는 케플러의 타원 궤도를 믿지 않았고, 원 궤도를 고집했는데, 이는 사소한 실수가 아니라 갈릴레오의 여러 견해를 이어주는 숨겨진 고리였다. 갈릴레오는 관성을 발견했음에도 불구하고 등가속운동을 하는 자유낙하 운동 역시도 자연스러운 운동처럼 취급했다. 오늘날의 입장에서 관성을 받아들일 경우 가속적인 운동은 외력이 있음을 의미하지만, 갈릴레오는 그에 대해 어떠한 언급도 하지 않았다. 갈릴레오는 심각한 모순을 범하고 있었던 것일까? 역사가는 갈릴레오가 제안한 ‘관성’이 오늘날의 관성과 다른 종류의 것이라는 것을 발견할 수 있으며, 그것이 중심으로부터의 거리가 변하지 않는 원운동과 관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중심으로부터의 거리가 줄어드는 수직운동에서 속도가 변하는 것은 갈릴레오에게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이러한 역사관을 반-휘그주의(anti-Whig)라고 부르며, 쿤은 이러한 과학사의 반-휘그주의 흐름에 함께 몸담고 있었다. 이러한 역사 서술에서 더 이상 과학은 갈릴레오가 관성을 발견하고, 뉴턴이 만유인력을 발견하는 식으로 축적적인 발전을 보여주지 않는다. | ||
그렇다면 이런 과학사는 과학의 어떤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까? 첫째, | 그렇다면 이런 과학사는 과학의 어떤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까? 첫째, 방법론적 지령의 불충분함(65쪽) 혹은 임의성(arbitrariness)이다. 다시 말해 방법론적 지령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여러 과학적 질문에 대해 유일한 결론을 보장해주지 않는다. 누군가 어떤 결론에 도달했다면, 그 결론에 이르는 데에는 모종의 다른 요소가 개입되었음이 틀림없다. 사건 경험이든, 아니면 우연이든, 아니면 개인적 성향이든 말이다. 만약 전기에 대해서 연구를 한다고 할 때, 별의 영향에 대해서도 검토를 해야 할까? 여러 가능한 실험 중 무엇을 먼저 해야 할까?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하든 그것은 모두 “과학적”이다. 분명 관찰과 경험은 과학적 믿음의 범위를 제한해주며, 그렇지 않다면 과학이 존재조차 못할 것이다. 그러나 관찰과 경험만으로는 특정한 믿음이 결정되지 않는다. “개인적인 이유에서나 역사적 우연 때문에 만들어진 임의적인 요소가 항상 한 시대의 과학자 공동체에 의해서 제창된 믿음의 구성성분으로 끼어들게 마련이다.”(66쪽) 그렇기에 한 주제에 대해 과학적으로 검토한 사람들이 서로 다른 의견을 갖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과학철학에서는 이러한 특징을 “관찰에 의한 이론 미결정성”이라고도 부른다.] | ||
따라서 효율적 연구는 모종의 근본적인 질문들에 대해 해답이 합의되었을 때에만 가능하다. 이것이 바로 ‘정상과학’의 모습이며, 쿤은 이를 “자연을 | 따라서 효율적 연구는 모종의 근본적인 질문들에 대해 해답이 합의되었을 때에만 가능하다. 이것이 바로 ‘정상과학’의 모습이며, 쿤은 이를 “자연을 전문적인 교육에 의해서 제공된 개념의 상자들에 끼워맞추려는 격렬하고 헌신적인 시도”(66쪽)라고 간단하게 묘사했으며, “그러한 상자들 없이는” 연구가 진행될 수 없을 거라 의심한다. 이에 대한 자세한 얘기는 3-5장에서 다룬다. 한편 “정상과학은 근본적인 새로움을 .. 억제”하기 마련이지만, “아주 오랫동안 억제되지 않을 것”이다. 의견 일치가 중대한 변칙과 같은 것에 의해 깨짐으로써 생겨난 형국이 ‘비상적인’ 탐구 기간이고, 이에 대해서는 6-8장에서 다룬다. 특히 그것이 새로운 공약에 의해 대체되는 사건이 ‘과학혁명’인데, “각 혁명은 과학의 탐구 대상이 되는 문제들의 이동을 낳았으며, 또한 그 전문 분야가 어떤 것을 받아들일 만한 문제로 간주할 것인가, 또는 적법한 문제 풀이로 인정할 것인가를 결정짓는 기준을 바꾸었다.”(27-28쪽) 쿤은 이러한 ‘과학혁명’이 이론의 변화뿐 아니라 어떤 사실의 발견에 의해서도 촉발되어 크고 작은 규모로 빈번하게 일어났다고 주장하며, 크든 작든 과학혁명은 기존에 수용된 과학의 많은 부분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고 말한다. 이에 대해서는 9-10장에서 다룬다. | ||
본론으로 넘어가기 전에, 역사와 철학 사이의 관계에 대해 잠시 살펴보자. 어떻게 기술에 불과한 역사가 규범적인 내용을 담지한 철학적 주장의 근거로 사용될 수 있는가? 예컨대 발견의 맥락/정당화의 맥락 구분, 즉 이론의 발견 과정에서는 어떠한 논리도 필요 없지만, 이론이 정당화되는 과정에서는 엄격한 논리적, 경험적 시험에 부쳐져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 역사는 무슨 말을 해줄 수 있는가? 쿤에 따르면, 그런 철학적 주장은 역사를 통해 테스트될 수 있다. 철학적 개념과 주장 역시도 완전히 순수한 추상적 개념을 제외하면 마땅히 실제 적용 대상을 가진다. 그것이 어떤 주장을 하는지, 잘 적용되는지 우리는 그 적용대상으로부터 얻은 자료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과학사는 바로 인식론(지식이론)의 | 본론으로 넘어가기 전에, 역사와 철학 사이의 관계에 대해 잠시 살펴보자. 어떻게 기술에 불과한 역사가 규범적인 내용을 담지한 철학적 주장의 근거로 사용될 수 있는가? 예컨대 발견의 맥락/정당화의 맥락 구분, 즉 이론의 발견 과정에서는 어떠한 논리도 필요 없지만, 이론이 정당화되는 과정에서는 엄격한 논리적, 경험적 시험에 부쳐져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 역사는 무슨 말을 해줄 수 있는가? 쿤에 따르면, 그런 철학적 주장은 역사를 통해 테스트될 수 있다. 철학적 개념과 주장 역시도 완전히 순수한 추상적 개념을 제외하면 마땅히 실제 적용 대상을 가진다. 그것이 어떤 주장을 하는지, 잘 적용되는지 우리는 그 적용대상으로부터 얻은 자료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과학사는 바로 인식론(지식이론)의 명제들이 적용될 수 있는 현상들의 보고이다. 따라서 과학사는 인식론을 시험하는 자료를 제공한다. 즉, 발견의 맥락/정당화의 맥락의 구분이 역사적 사례들, 즉 지식이 획득되고, 수용되고, 동화되는 실제 상황에 잘 적용되지 않는다면, 그 구분은 재고되어야 할 것이다. | ||
== 토론거리 == | |||
* 쿤이 책 전체를 통해 공격하고자 하는 과학의 이미지는 무엇이며, 쿤의 대안은 무엇인가? | |||
* 과거의 믿음들 중에서 엉터리로 생각되는 것을 떠올려보고, 그것을 과학이라 부를 수 있을지 생각해보자. | |||
* 정치사든, 전쟁사든, 과학사든, 우리가 역사를 배움으로써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교훈을 떠올려보고, 그에 대해 쿤은 어떻게 말할지 생각해보자. | |||
* 기술(description)에 불과한 역사가 규범적 주장에 대한 근거로 사용될 수 있을까? 쿤의 입장은 무엇이며, 그에 대한 당신의 생각은 어떠한가? | |||
== 책의 목차 == | == 책의 목차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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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9월 11일 (월) 20:18 기준 최신판
토머스 쿤, 『과학혁명의 구조』 제4판 (까치, 2013), 1장
“만약 역사가 일화나 연대기 이상의 것들로 채워진 보고라고 간주된다면, 역사는 우리가 지금 홀려 있는 과학의 이미지에 대해서 결정적인 변형을 일으킬 수 있을 것이다.”(61쪽) 여기서 말하는 “우리가 홀려 있는지 과학의 이미지”는 어디서 형성된 것이며 어떤 이미지를 말하는가? 그 이미지는 주로 과학 교과서에 의해 형성된 것으로, 거기에 등장하는 과학적 방법이란 단지 교과서 속 자료나 일반화를 얻게 해주는 실험적 조작 및 논리적 조작을 의미하기 마련이고, 과학은 그 교과서에 실린 사실, 이론, 방법들의 집합이 된다. 이러한 과학에 따르면, “과학자는 성공적이든 성공적이지 않든 간에 그 특정한 집합에 한두 가지 요소를 보태기 위해 온갖 애를 쓰는 사람이 된다. 과학의 발전은 과학적 테크닉과 지식을 이루면서 날로 쌓여가는 자료 더미에, 하나씩 또는 여러 개씩 이들 항목이 덧붙여지면서 차츰차츰 진행되는 과정이 된다. 그리고 과학사는 이러한 연속적인 누적과 이 누적을 방해한 [신화나 미신과 같은] 장애물의 연대기를 기록하는 분야가 된다.”(62쪽) 이러한 과학의 이미지를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누적(축적)에 의한 발전”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과학의 역사를 세밀히 들여다본 최근의 과학사학자들은 과학이 단순한 “누적에 의한 발전”으로 묘사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있다. 어떤 점에서 그러한가? 첫째로, 새로운 발견의 시점을 명확히 말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산소는 언제 발견되었는지, 에너지 보존을 처음 알아낸 사람은 누구인지 답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심지어 그런 질문 자체가 잘못된 질문일 수도 있다. 이러한 문제 때문에 쿤은 “아마도 과학은 개별적인 발견과 발명의 누적에 의해서 발달되는 것이 아닐 것”(23쪽)이라는 의심을 제기한다. 둘째로, 과거의 관찰과 믿음에서 “과학적인” 요소를 선대 과학자들이 “오류”와 “미신”이라 단언했던 것들과 구별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역학, 플로지스톤 화학, 칼로릭 열역학을 자세히 들여다볼수록, 그러한 견해가 오늘날 수용된 견해보다 덜 과학적인 것도 아니고, 오늘날보다 더 유별난 것도 아니다. 그러한 과거의 견해를 신화나 미신이라고 한다면, 오늘날에도 우리의 과학자들은 신화를 만들어내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반대로 그것을 과학이라고 부른다면, 과학에는 현재 우리가 과학으로 믿고 있는 것들과는 거리가 먼 것들까지 포함될 것이다.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한다면 무엇을 선택할까?
쿤을 포함한 과학사학자들은 후자를 선택했다. “시대에 뒤진 이론들이 폐기되어버렸다는 이유로, 원칙적으로 비과학적인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선택은 과학의 발전을 누적의 과정으로 보기 어렵게 만든다.”(63쪽) 이제 과학사학자들은 과학의 누적인 발전을 포기하고 다른 질문을 던진다. “역사가들은 보다 옛 과학이 현재까지의 진보를 위해 베푼 영속적 기여를 따지기보다, 바로 그 당대에서 그 과학의 역사적인 온전성(historical integrity)을 드러내려고 애쓰고 있다.”(64쪽) 예를 들어, 갈릴레오에 대해 연구한다고 생각해보자. 역사가는 무슨 질문을 던질까? 갈릴레오가 현대 과학에 무슨 기여를 했는지 묻기보다, 갈릴레오의 견해가 정말 무엇이었으며, 그 견해가 당대의 지적 그룹들과 어떤 관련을 맺고 있었는지 묻는다. 특히 갈릴레오의 어떤 견해가 참이고, 다른 어떤 견해가 오류였는지 밝히는 것이 아니라, 그 시대에 살던 갈릴레오가 정말 어떤 생각을 품고 있었는지 묻는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매우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한 것처럼 보이는 것에서 과학사학자들은 겉으로는 잘 드러나지 않는 갈릴레오 머릿속의 정합성을 드러내어 보여주기도 한다. (예를 들어, 갈릴레오는 케플러의 타원 궤도를 믿지 않았고, 원 궤도를 고집했는데, 이는 사소한 실수가 아니라 갈릴레오의 여러 견해를 이어주는 숨겨진 고리였다. 갈릴레오는 관성을 발견했음에도 불구하고 등가속운동을 하는 자유낙하 운동 역시도 자연스러운 운동처럼 취급했다. 오늘날의 입장에서 관성을 받아들일 경우 가속적인 운동은 외력이 있음을 의미하지만, 갈릴레오는 그에 대해 어떠한 언급도 하지 않았다. 갈릴레오는 심각한 모순을 범하고 있었던 것일까? 역사가는 갈릴레오가 제안한 ‘관성’이 오늘날의 관성과 다른 종류의 것이라는 것을 발견할 수 있으며, 그것이 중심으로부터의 거리가 변하지 않는 원운동과 관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중심으로부터의 거리가 줄어드는 수직운동에서 속도가 변하는 것은 갈릴레오에게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이러한 역사관을 반-휘그주의(anti-Whig)라고 부르며, 쿤은 이러한 과학사의 반-휘그주의 흐름에 함께 몸담고 있었다. 이러한 역사 서술에서 더 이상 과학은 갈릴레오가 관성을 발견하고, 뉴턴이 만유인력을 발견하는 식으로 축적적인 발전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런 과학사는 과학의 어떤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까? 첫째, 방법론적 지령의 불충분함(65쪽) 혹은 임의성(arbitrariness)이다. 다시 말해 방법론적 지령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여러 과학적 질문에 대해 유일한 결론을 보장해주지 않는다. 누군가 어떤 결론에 도달했다면, 그 결론에 이르는 데에는 모종의 다른 요소가 개입되었음이 틀림없다. 사건 경험이든, 아니면 우연이든, 아니면 개인적 성향이든 말이다. 만약 전기에 대해서 연구를 한다고 할 때, 별의 영향에 대해서도 검토를 해야 할까? 여러 가능한 실험 중 무엇을 먼저 해야 할까?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하든 그것은 모두 “과학적”이다. 분명 관찰과 경험은 과학적 믿음의 범위를 제한해주며, 그렇지 않다면 과학이 존재조차 못할 것이다. 그러나 관찰과 경험만으로는 특정한 믿음이 결정되지 않는다. “개인적인 이유에서나 역사적 우연 때문에 만들어진 임의적인 요소가 항상 한 시대의 과학자 공동체에 의해서 제창된 믿음의 구성성분으로 끼어들게 마련이다.”(66쪽) 그렇기에 한 주제에 대해 과학적으로 검토한 사람들이 서로 다른 의견을 갖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과학철학에서는 이러한 특징을 “관찰에 의한 이론 미결정성”이라고도 부른다.]
따라서 효율적 연구는 모종의 근본적인 질문들에 대해 해답이 합의되었을 때에만 가능하다. 이것이 바로 ‘정상과학’의 모습이며, 쿤은 이를 “자연을 전문적인 교육에 의해서 제공된 개념의 상자들에 끼워맞추려는 격렬하고 헌신적인 시도”(66쪽)라고 간단하게 묘사했으며, “그러한 상자들 없이는” 연구가 진행될 수 없을 거라 의심한다. 이에 대한 자세한 얘기는 3-5장에서 다룬다. 한편 “정상과학은 근본적인 새로움을 .. 억제”하기 마련이지만, “아주 오랫동안 억제되지 않을 것”이다. 의견 일치가 중대한 변칙과 같은 것에 의해 깨짐으로써 생겨난 형국이 ‘비상적인’ 탐구 기간이고, 이에 대해서는 6-8장에서 다룬다. 특히 그것이 새로운 공약에 의해 대체되는 사건이 ‘과학혁명’인데, “각 혁명은 과학의 탐구 대상이 되는 문제들의 이동을 낳았으며, 또한 그 전문 분야가 어떤 것을 받아들일 만한 문제로 간주할 것인가, 또는 적법한 문제 풀이로 인정할 것인가를 결정짓는 기준을 바꾸었다.”(27-28쪽) 쿤은 이러한 ‘과학혁명’이 이론의 변화뿐 아니라 어떤 사실의 발견에 의해서도 촉발되어 크고 작은 규모로 빈번하게 일어났다고 주장하며, 크든 작든 과학혁명은 기존에 수용된 과학의 많은 부분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고 말한다. 이에 대해서는 9-10장에서 다룬다.
본론으로 넘어가기 전에, 역사와 철학 사이의 관계에 대해 잠시 살펴보자. 어떻게 기술에 불과한 역사가 규범적인 내용을 담지한 철학적 주장의 근거로 사용될 수 있는가? 예컨대 발견의 맥락/정당화의 맥락 구분, 즉 이론의 발견 과정에서는 어떠한 논리도 필요 없지만, 이론이 정당화되는 과정에서는 엄격한 논리적, 경험적 시험에 부쳐져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 역사는 무슨 말을 해줄 수 있는가? 쿤에 따르면, 그런 철학적 주장은 역사를 통해 테스트될 수 있다. 철학적 개념과 주장 역시도 완전히 순수한 추상적 개념을 제외하면 마땅히 실제 적용 대상을 가진다. 그것이 어떤 주장을 하는지, 잘 적용되는지 우리는 그 적용대상으로부터 얻은 자료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과학사는 바로 인식론(지식이론)의 명제들이 적용될 수 있는 현상들의 보고이다. 따라서 과학사는 인식론을 시험하는 자료를 제공한다. 즉, 발견의 맥락/정당화의 맥락의 구분이 역사적 사례들, 즉 지식이 획득되고, 수용되고, 동화되는 실제 상황에 잘 적용되지 않는다면, 그 구분은 재고되어야 할 것이다.
토론거리
- 쿤이 책 전체를 통해 공격하고자 하는 과학의 이미지는 무엇이며, 쿤의 대안은 무엇인가?
- 과거의 믿음들 중에서 엉터리로 생각되는 것을 떠올려보고, 그것을 과학이라 부를 수 있을지 생각해보자.
- 정치사든, 전쟁사든, 과학사든, 우리가 역사를 배움으로써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교훈을 떠올려보고, 그에 대해 쿤은 어떻게 말할지 생각해보자.
- 기술(description)에 불과한 역사가 규범적 주장에 대한 근거로 사용될 수 있을까? 쿤의 입장은 무엇이며, 그에 대한 당신의 생각은 어떠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