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페르니쿠스 혁명/코페르니쿠스의 혁신

토머스 쿤 지음, 정동욱 옮김, 『코페르니쿠스 혁명 : 행성 천문학과 서구 사상의 발전』 (지식을만드는지식, 2016), 5장.

코페르니쿠스와 혁명

우리가 ‘코페르니쿠스 혁명’이라 부르는 천문학과 우주론의 격변은 1543년 코페르니쿠스의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의 출판과 함께 개시된다. 이 점에서 우리는 지금까지 혁명이 일어난 무대를 마련해 준 혁명의 배경만을 다룬 셈이다. 이제 우리는 혁명 그 자체로 눈을 돌릴 것이며, 우선 이 장에서는 혁명에 대한 코페르니쿠스의 기여들을 다룰 것이다. 가능한 한 우리는 새로운 천문학을 세계에 내놓은 책인 『회전에 관하여』에 있는 코페르니쿠스 자신의 말들을 통해 그 기여들을 찾아낼 것이다. 거의 곧바로 우리는 어려움과 부조화에 직면할 것이며, 그것의 해결은 코페르니쿠스 혁명에 대한 우리의 이해에 달려 있다. 또한 그 혁명은 많은 측면에서 전형적이기 때문에, 그것은 과학에서 일어난 주요한 다른 모든 개념적 격변에 대한 우리의 이해와도 관련되어 있을 것이다.

『회전에 관하여』는 우리에게 많은 문제를 야기하는 작품이다. 그 문제들의 일부는 단순히 그것이 다루는 주제의 고유한 어려움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도입에 해당하는 제1권을 제외하면 다른 모든 부분은 너무 수학적이어서 전문적으로 숙련된 천문학자가 아니면 읽어도 이해할 수가 없다. 『알마게스트』를 다룰 때 썼던 방법처럼, 우리는 그 책의 핵심에 해당하는 전문적인 기여들을 비교적 비수학적인 방식으로 풀어서 다룰 것이며, 이 과정에서 『회전에 관하여』가 16세기 독자들에게 제시한 핵심적인 문제들 중 일부는 건너뛸 것이다. 코페르니쿠스가 새로운 천문학을 이 장에서처럼 단순화된 형태로 제기했다면, 그 수용은 상당히 달라졌을 수도 있다. 이를테면, 더 이해하기 쉬우니 반대가 곧바로 형성되었을지 모른다. 따라서 우리의 일차적인 문제는 혁명을 개시한 연구의 핵심적인 책과 우리 사이에 놓인 전문성의 장벽이 된다.

그러나 『회전에 관하여』의 전문적인 난해함은 우선적으로 인식될 필요가 있긴 하지만, 코페르니쿠스의 작업에 내재한 문제들 중 가장 어려운 것도, 가장 중요한 것도 아니다. 『회전에 관하여』의 주된 어려움들을 비롯해 우리가 회피할 수 없는 어려움들은 오히려 그 책 자체와 천문학의 발전에서 그것이 수행한 역할이 잘 어울려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 기인한다. 그 책의 귀결로 볼 때, 『회전에 관하여』는 의심의 여지 없이 혁명적인 작업이다. 그것으로부터 행성 천문학에 대한 근본적으로 새로운 접근과 행성들의 문제에 대한 최초의 정밀하면서도 단순한 해법이 나왔으며, 궁극적으로는 그 체계에 다른 가닥들이 더해져 새로운 우주론이 나왔다. 그러나 이러한 결과를 아는 그 어떤 독자들에게도, 『회전에 관하여』 그 자체는 지속적인 퍼즐이자 역설임에 틀림없는데, 왜냐하면 그 귀결들에 비해 그 책은 비교적 고루하고, 차분하고, 비혁명적인 저작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코페르니쿠스 혁명에 대해 알고 있는 핵심적인 요소들은 대부분 행성의 위치에 대한 쉽고 정확한 계산, 주전원과 이심의 폐기, 천구들의 해체, 별로서의 태양, 우주의 무한한 확장과 같은 것일 텐데, 이를 비롯해 여타 많은 것들은 코페르니쿠스의 작업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는다. 땅의 운동을 제외하면 모든 측면에서 『회전에 관하여』는 후속 세대의 글들보다 고대와 중세의 천문학자들과 우주론자들의 저작들과 훨씬 더 유사해 보인다. 코페르니쿠스의 저작을 기반으로 연구를 수행한 후속 세대들은 그 책의 저자조차도 자신의 책에서 보지 못했던 급진적인 귀결들을 명시적으로 끌어냈다.

그렇다면 『회전에 관하여』의 중요성은 그 책이 스스로 말한 것보다 그 책이 다른 이들로 하여금 말하게 한 것에 있다. 그 책은 자신이 거의 얘기한 적이 없었던 혁명을 낳았다. 그 책은 혁명적인 저작이라기보다 혁명을 야기한 저작이다. 그러한 글은 과학적 사상의 발전에서 비교적 빈번하게 나타나는 매우 중요한 현상으로, 과학적 사상의 발전 방향을 전환시키는 글로도 얘기할 수 있을 것이다. 혁명을 야기하는 연구는 옛 전통의 정점인 동시에 새로운 미래 전통의 원천이 된다. 전체적으로 『회전에 관하여』는 거의 전적으로 고대의 천문학과 우주론 전통 안에 서 있다. 그러나 대체로 고전적인 틀 내에서도 몇 가지 새로움이 발견되는데, 이들은 과학적 사상의 방향을 저자가 예기치 않았던 방식으로 전환시키고 고대의 전통을 빠르고 완전하게 붕괴시킨다. 천문학의 역사가 제공하는 관점에서 보면, 그 책은 이중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그 책은 고전적인 동시에 근대적이며, 보수적인 동시에 급진적이다. 따라서 그 책의 중요성은 그것의 과거와 미래, 즉 그것이 기원한 전통과 그것으로부터 기인한 전통을 동시에 바라봄으로써만 발견할 수 있다.

하나의 저작에 대한 이중적 관점은 이 장의 주된 문제다. 코페르니쿠스와 그가 배운 고대 천문학 전통은 어떤 관계였는가? 더 정확하게, 모종의 천문학적 혁신이 필수적이라고, 즉 고대 우주론과 천문학의 일부 측면들을 거부해야 한다고 그가 믿게 된 것은 그 전통의 어떤 측면들 때문이었는가? 옛 전통과 단절하기로 결심하고서도, 천문학의 수행에 필요한 지적·관찰적 도구들의 유일한 원천이었던 그 전통에 그는 얼마만큼이나 계속 얽매여 있어야 했는가? 다시, 현대적인 행성 천문학과 우주론의 전통은 코페르니쿠스와 어떤 관계인가? 고전 천문학의 훈련과 도구에 의한 제약이 있는 상황에서, 그의 연구는 어떤 창의적인 혁신들을 담을 수 있었을까? 그러한 혁신들은 대체로 고전적이었던 틀 안에서 어떻게 처음 장착될 수 있었을까? 그리고 그러한 새로움은 그의 계승자들에게 어떻게 인식되고 채택될 수 있었는가? 이러한 문제들과 그에 따른 귀결들은 『회전에 관하여』를 비롯해 과학적 사상의 한 전통 내에서 태어났음에도 궁극적으로는 그 부모를 파괴하는 새로운 전통의 원천이 되는 모든 과학적 연구의 진정한 어려움들을 보여 주는 징후다.

혁신의 동기들−코페르니쿠스의 서문

코페르니쿠스는 과거 프톨레마이오스의 연구에서 절정에 이르렀던 전문적인 수리 천문학의 온전한 헬레니즘 전통을 처음으로 되살린 유럽의 소규모 그룹의 일원이다. 『회전에 관하여』는 『알마게스트』를 모델로 삼았으며, 사실상 프톨레마이오스의 논문을 읽을 수 있는 소규모 그룹의 당대 천문학자들만을 겨냥한 책이었다. 코페르니쿠스와 함께 일단 우리는 발전된 프톨레마이오스 체계를 앞의 2장에서 검토할 때 마지막으로 다루었던 종류의 전문적인 천문학의 문제로 돌아갈 것이다. 실제로 우리는 똑같은 문제로 돌아가게 된다. 『회전에 관하여』는 코페르니쿠스가 느끼기에 프톨레마이오스와 그의 후계자들이 풀지 못한 채 남겨 둔 행성들의 문제를 풀기 위해 쓴 책이다. 코페르니쿠스의 연구에서 땅의 운동이라는 혁명적인 관념은 처음에는 행성들의 위치를 계산하는 데 사용되는 기법들을 개선하고자 했던 능숙하고 헌신적인 천문학자의 노력이 낳은 이례적인 부산물이었다. 그것은 『회전에 관하여』의 첫 번째 중요한 부조화로서, 코페르니쿠스의 혁신을 야기한 목적과 혁신 그 자체 사이의 불균형을 의미한다. 이는 그가 자신의 동기와 생각의 출처 및 과학적 성취의 성격을 개괄하기 위해 책 앞에 덧붙인 서문의 거의 시작 부분에서 발견할 수 있다.[1]

바오로 3세 교황님께

회전에 관한 책에 대한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의 서문

교황님, 천구의 회전에 관한 이 책에서 저는 지구에 운동을 부여했는데, 어떤 사람들은 이 얘기를 듣자마자 그런 생각을 품은 저를 끌어내려야 한다고 항의하리라는 걸 충분히 예상하고 있습니다. 저에게도 저 자신의 연구가 그렇게 마음에 드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저는 다른 사람들이 그에 대해 내릴 판단에 대해서 큰 무게를 두지 않으려 합니다. 또한 (철학자의 목표는 신이 인간 이성에 허락한 범위 안에서 모든 것들에 대한 진리를 찾는 것이므로) 저는 철학자의 사유가 대중의 판단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저는 완전히 잘못된 생각들은 피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와 반대되는 생각, 즉 지구가 우주 한복판의 중심으로서 움직이지 않고 있다는 견해가 옳다는 점을 오랜 세월 동안 인정해 왔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이들에게 지구에 운동을 부여하는 것이 실로 저의 터무니없는 행동으로 보일 것이라고 마음속으로 생각하면서, 저는 지구의 운동을 증명하기 위해 쓴 이 논평을 공개해야 할지, 아니면 리시스(Lysis)가 히파르코스에게 보낸 편지에 나타난 것처럼, 글이 아니라 말로써 동료와 친구들에게만 철학적 신비를 전수했던 피타고라스주의자들과 같은 사람들의 선례를 따르는 게 나을지 오랫동안 고심했습니다. [이 편지는 코페르니쿠스가 한때 『회전에 관하여』에 포함시키려고도 했던 것으로, 신비주의 추종 집단의 일원이 아닌 사람들에게 자연의 신비를 드러내지 말라는 피타고라스주의와 신플라톤주의의 엄명을 담고 있다. 그에 대한 이 언급은 바로 앞 장에서 살펴본 르네상스 시기 신플라톤주의의 재유행에 코페르니쿠스가 동참했음을 보여 주고 있다.] 제 판단에, 그들이 그랬던 것은 일부가 생각하는 것처럼 자신들의 학설을 공유하기 아까워서가 아니라, 대학자가 힘겹게 이룬 무척이나 고귀한 이 발견들이 사람들로부터 모욕당하는 것이 두려워서였을 것입니다. 이를테면,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면 어떤 것도 공부하려 들지 않는 사람들이나, 다른 사람들의 격려와 모범으로 자유로운 철학적 탐구를 하게 되더라도 아둔한 머리 때문에 철학자들 사이에서는 벌들 사이의 수벌[2]과 같은 신세일 뿐인 사람들에게 모욕당하는 것을 말입니다. 이를 고려한 저는 제 견해의 새로움과 부조화로 인해 받게 될 경멸을 염려해 프로젝트를 거의 포기할 뻔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걱정과 저의 거부 의사를 극복하게 된 것은 제 친구들 덕분입니다. … [그중 한 명은] 제가 9년[3]도 아닌 그 4배나 되는 기간 동안이나 간직해 왔던 이 책을 … 출판하라며 자주 설득하고 때로는 들들 볶기까지 했습니다. … 그들은 수학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의 공동 이익을 위해 저의 연구 성과를 내놓는 것을 더 이상 두려움 때문에 거부해서는 안 된다고 충고했습니다. 그들은 지구의 운동에 대한 제 이론이 처음에는 이상해 보이겠지만, 제 해명이 담긴 논고가 출판되어 불합리함의 안개가 걷히고 나면 감탄하며 수용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저는 그들의 설득에 못 이겨 그들이 그토록 원했던 제 연구의 출판을 허락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전부터 저는 이 연구를 완수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지구의 운동에 관한 제 생각을 글로 적는 데도 주저하지 않았기에, 교황님께서는 제가 연구 결과를 발표하기로 마음먹은 것에 대해 그렇게 놀라지 않으실 겁니다. [『회전에 관하여』가 출판되기 몇 년 전, 코페르니쿠스는 그의 태양 중심 천문학의 초기 버전을 담고 있는 『코멘타리오루스(Commentariolus)』라는 짧은 원고를 친구들 사이에 돌렸다. 코페르니쿠스의 주요 연구 성과에 대한 또 하나의 사전 보고서는 그의 제자인 레티쿠스(Rheticus)가 작성한 『나라티오 프리마(Narratio Prima)』로, 1540년에 나왔고 1541년에도 다시 나왔다.] 교황님께서는 제가 무슨 생각으로 수학자들의 통념에 반할 뿐 아니라 상식에도 완전히 반하는 지구의 운동이라는 것을 감히 상상하게 되었는지를 더 궁금해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제가 천구들의 운동을 계산하는 다른 방법을 생각하게 된 것은 다름이 아니라 이에 대한 수학자들의 연구가 서로 일치하지 않는다는 깨달음 때문이었음을 교황님께 솔직하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첫째로, 수학자들은 태양과 달의 운동에 대해 너무나 확신이 없어서 1년(계절년)의 일정한 길이를 설명하지도 관측하지도 못합니다. 둘째로, 태양과 달뿐 아니라 다섯 행성의 운동을 결정하는 데서 그들은 겉보기 운동과 회전에 대한 동일한 원리와 가정도, 동일한 증명도 사용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동심원만을 사용하고[아리스토텔레스적 체계. 에우독소스와 칼리포스로부터 시작되어 아리스토텔레스를 거쳐 전해진 체계로, 코페르니쿠스가 죽기 직전 이탈리아의 천문학자 프라카스토로(Fracastoro)와 아미치(Amici)에 의해 유럽에서 유행했다], 또 다른 사람들은 이심원과 주전원을 사용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방법으로도 그들은 목표를 완전히 달성하지 못합니다. 동심원을 믿은 이들은 몇몇 다른 운동들이 그것들로 합성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긴 했지만, 그것을 가지고 현상과 일치하는 체계를 만들 수는 없었습니다. 이심원 체계를 고안했던 이들은 그들의 가정에 부합하는 계산을 통해 겉보기 운동을 거의 완벽하게 만들어 낸 것처럼 보이지만, 운동의 균일성이라는 제1원리를 위반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퀀트의 사용과 같은] 많은 것들도 동시에 허용했습니다. 또한 그것 때문에 그들은 우주의 형태나 그 부분들의 불변의 대칭성과 같은 중요한 사항은 이해하거나 도출할 수도 없게 되었습니다. 이는 마치 한 화가가 각각 다른 모델로부터 각각 아주 잘 그려진 손, 발, 머리 등을 모아 자신의 그림을 완성하나 그것이 한 사람의 모습으로는 보이지 않는 것과 같으며, 여기서 그 조각들은 서로 전혀 어울리지 않기 때문에 그 결과물은 사람이라기보다는 괴물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수학자들이 ‘방법’이라고도 부르는 그들의 증명 과정에서, … 우리는 그들이 꼭 필요한 세부 사항을 빠트린다든지, 이질적일 뿐 아니라 완전히 무관한 것을 도입하기도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만약 그들이 확고한 원리를 따랐다면 이런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도입한 가설들이 잘못되지 않았다면, 그로부터 따라 나오는 모든 귀결도 반드시 참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제 말이 지금은 이해하기 어려울지 모르지만, 그것은 적절한 때가 되면 분명해질 것입니다.

코페르니쿠스의 말에 따르면, 당시의 천문학을 솔직하게 평가한다면 행성들의 문제에 대한 지구 중심의 접근은 가망이 없다는 것이 드러난다. 프톨레마이오스 천문학의 전통적인 기법들은 그 문제를 지금까지 풀지 못했고 앞으로도 풀지 못할 것이다. 대신 그들은 괴물을 만들어 냈다. 그는 전통적인 행성 천문학의 기본 개념들에 근본적인 오류가 있는 것이 틀림없다고 결론을 내린다. 이는 처음으로 전문적인 능력을 갖춘 천문학자가 자신의 과학 내적인 이유에서 유서 깊은 과학적 전통을 거부한 것으로, 기술적인 오류에 대한 이러한 전문가적 인식이 코페르니쿠스 혁명의 막을 연 것이다. 절실한 필요는 코페르니쿠스의 혁신의 어머니였다. 그러나 필요하다는 느낌은 새로운 것이었다. 이전까지 천문학 전통은 괴물처럼 보이지 않았다. 어떤 변화가 코페르니쿠스의 시대에 일어난 것으로, 코페르니쿠스의 서문은 그러한 변화의 절실한 원인들을 훌륭하게 묘사해 준다.

코페르니쿠스와 그의 동시대인들은 『알마게스트』뿐 아니라 프톨레마이오스 체계를 비판하고 수정한 많은 이슬람 천문학자들과 몇몇 유럽 천문학자들의 천문학도 물려받았다. 이들이 코페르니쿠스가 “수학자들”이라고 지칭하는 사람들이다. 누군가는 작은 원 몇 개를 더하거나 뺐고, 다른 누군가는 프톨레마이오스가 애초에 이심원을 이용해 다루었던 행성의 불규칙성을 설명하기 위해 주전원을 사용했으며, 또 다른 누군가는 1주전원 1주원 체계로 예측되는 운동과의 작은 차이를 설명하기 위해 프톨레마이오스는 알지 못했던 방법을 발명했고, 또 다른 이들은 새로운 측정을 이용해 프톨레마이오스 체계의 합성된 원들이 도는 속도를 변경했다. 이제는 프톨레마이오스 체계가 하나가 아니라 한 다스 이상 존재했으며, 그 수는 기술적으로 능숙한 천문학자들의 숫자와 함께 빠르게 증가하고 있었다. 이 모든 체계는 『알마게스트』의 체계를 모델로 삼았으며, 따라서 그 모두는 ‘프톨레마이오스적’이었다. 그러나 너무 많은 변종 체계가 있었기 때문에 ‘프톨레마이오스적’이라는 형용사는 그 의미의 상당 부분을 잃게 되었다. 천문학 전통은 산만해졌다. 그 전통은 더 이상 천문학자가 행성의 위치를 계산하는 데 사용할 수 있는 기법들을 완전하게 정해 주지 않았고, 따라서 천문학자의 계산을 통해 얻게 될 결과도 정해 줄 수 없었다. 이와 같은 애매함은 천문학 전통이 가진 고유한 힘의 주된 원천을 빼앗아 갔다.

코페르니쿠스의 괴물은 다른 면도 가지고 있다. 코페르니쿠스가 알고 있던 ‘프톨레마이오스적’ 체계들 중 어떤 것도 양질의 맨눈 관찰과 딱 일치하는 결과를 제공하지 못했다. 그 체계들은 프톨레마이오스의 결과보다 나쁘진 않았지만, 좋은 것도 아니었다. 프톨레마이오스는 그런 의문을 가질 수 없었겠지만, 13세기 동안의 성과 없는 연구 이후에 통찰력 있는 한 천문학자가 똑같은 전통 내에서 계속 더 시도를 해 보는 것에 대해 과연 성공적일 수 있을지 의문을 갖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프톨레마이오스와 코페르니쿠스 사이에 놓인 오랜 세월은 전통적인 접근의 오차들을 돋보이게 만들었고, 이는 불만의 또 다른 원천이 되었다. 주전원과 주원 체계의 운동은 시곗바늘의 운동과 다르지 않은데, 시계의 오차는 시간이 흐를수록 함께 증가한다. 이를테면, 시계가 10년에 1초씩 뒤처진다면, 1년이나 10년 뒤 그 오차는 분명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1000년 후에는 그 오차가 거의 2분 가까이 증가해서 그냥 지나칠 수 없게 될 것이다. 코페르니쿠스와 그의 동시대인들은 프톨레마이오스의 자료가 포괄했던 기간보다 13세기나 더 긴 기간에 걸친 천문 자료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체계에 대해 훨씬 더 세심한 검사를 할 수 있었다. 그들은 고대의 접근에 내재한 오차들을 더 많이 알 수밖에 없었다.

시간의 흐름은 16세기 천문학자에게 엉터리 문제도 제공했는데, 역설적으로 이 문제는 프톨레마이오스적 방법에 오류가 있다는 인식을 조성하는 데 행성들의 실제 운동보다 훨씬 더 효과적이었다. 코페르니쿠스와 그의 동료들이 물려받은 자료의 상당수는 행성과 별들이 한 번도 있었던 적이 없던 위치에 놓인 잘못된 자료였다. 일부 잘못된 기록은 실력 없는 관찰자들이 수집한 것들이었고, 나머지는 좋은 관찰에도 불구하고 전수 과정 중에 잘못 베끼거나 잘못 해석한 것들이었다. 어떠한 단순한 행성 체계도, 프톨레마이오스의 체계든, 코페르니쿠스의 체계든, 케플러의 체계든, 뉴턴의 체계든, 르네상스 천문학자들이 설명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그 자료들에 질서를 부여할 수 없었다. 르네상스 자료가 제공한 문제의 복잡성은 하늘 그 자체의 문제를 넘어섰다. 그 자료는 코페르니쿠스로 하여금 프톨레마이오스 체계를 거부하는 데 도움을 주었지만, 그 자신 역시 그 자료의 희생자였다. 만약 그가 선배들의 수학적 체계에 대해 회의적이었던 만큼 그들의 관찰에 대해서도 회의적이었다면, 그의 체계는 훨씬 더 나은 결과를 냈을 것이다.

산만함과 지속된 부정확성, 이것들은 코페르니쿠스가 묘사한 괴물의 두 가지 중요한 특징이다. 코페르니쿠스 혁명이 천문학 전통 그 자체 내에서의 명시적인 변화에 의존했다고 할 때, 이들은 그 주된 원천이 된다. 그러나 그것들이 전부는 아니다. 우리는 왜 하필 코페르니쿠스가 그 괴물을 인식할 수 있었는지도 물을 수 있다. 그 전통의 명백한 변화의 일부는 분명 보는 사람의 눈에도 달려 있었다. 왜냐하면 그 전통은 이미 전부터 산만했고 부정확했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는 이 질문을 이미 다룬 적이 있다. 괴물 같음에 대한 코페르니쿠스의 깨달음은 더 큰 철학적·과학적 분위기에 달려 있었는데, 그 기원과 성격은 앞 장에 묘사되어 있다. 당대의 천문학이 처한 상황에서 코페르니쿠스의 신플라톤주의적 경향이 없었던 사람이라면 행성들의 문제에는 단순하면서도 정확한 해답이 있을 수 없다는 결론만을 내렸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스콜라적 비판의 전통에 익숙하지 않았던 천문학자라면 자신의 분야에 대해 그와 유사한 비판들을 발전시킬 수 없었을 것이다. 앞 장에서 개진된 이러저러한 새로움들은 코페르니쿠스 시대의 주된 흐름이었다. 코페르니쿠스는 그것들을 의식하지 않았을지 모르지만, 그는 이러한 철학적 흐름에 올라타 있었다. 이는 그의 동시대인들이 자신도 모르게 운동하는 지구에 올라타고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다. 코페르니쿠스의 연구는 천문학의 내적 상황과 그 시대의 더 큰 지적 분위기 둘 모두와의 관계 속에서 보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다. 둘은 함께 괴물을 만들어 냈다.

그러나 인식된 괴물에 대한 불만은 코페르니쿠스 혁명을 향한 첫 걸음에 불과했다. 그다음은 탐색인데, 그 출발점은 코페르니쿠스의 서문 중 남은 부분에 묘사되어 있다.

저는 천구들의 체계의 운동을 정립하는 문제와 관련해서 수학적 전통에 이러한 불확실성이 있다는 것에 대해 오랫동안 숙고했습니다. 결국 저는 이 세상의 다른 면들에 대해서는 극도로 사소한 점들까지 그렇게 면밀하게 탐구했던 철학자들이 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하고 질서 정연한 창조자가 창조한 우주의 작동에 대해서는 어떠한 확실한 이론에도 전혀 이르지 못했다는 것에 화가 나기 시작했습니다. [어떻게 코페르니쿠스가 “질서 정연한”을 “수학적으로 정돈된”과 등치시키는지에 주목하라. 이는 멀쩡한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라면 누구라도 거세게 반대했을 신플라톤주의의 한 측면이다. 다른 종류의 질서 정연함도 존재한다.] 그래서 저는 학교에서 배우는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천구의 운동을 제안한 사람이 과연 있었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제가 구할 수 있는 모든 철학자들의 책을 다시 읽어 보았습니다. 그리하여 처음으로 저는 키케로(Cicero)의 저작에서 [시라쿠사의] 히케타스(Hicetas, 기원전 5세기)가 지구는 움직인다고 생각했다는 것을 찾아냈습니다. 그리고 플루타르코스(Plutarch)의 저작에서 그와 같은 견해를 가진 사람들이 좀 더 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이를 모든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 플루타르코스 본인의 말을 여기에 옮겨 적도록 하겠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지구가 정지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피타고라스주의자인 필롤라오스(Philolaus, 기원전 5세기)는 지구가 태양과 달처럼 [중심의] 불 주위를 비스듬한 원을 따라 돈다고 말한다. 폰토스의 헤라클레이데스와 피타고라스주의자인 에크판토스(Ecphantus, 기원전 4세기)도 지구가 움직인다고 말하지만, 공간 사이를 지나다니는 것은 아니고 축을 중심으로 도는 바퀴처럼 서쪽에서 동쪽으로 자기 자신의 중심을 돌 뿐이라고 한다.”

이를 이용해 저도 지구의 운동 가능성에 대해 숙고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견해가 불합리하게 보일지라도, 저보다 앞선 사람들이 천체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어떠한 원이든 상상해 보는 자유를 누렸다는 것을 알고 나니 제가 지구의 어떤 운동을 가정해 천구들의 회전에 대해 그들보다 나은 설명을 만들 수 있을지 시도해 보는 것 역시 분명히 용납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하여 저는 이 책에서 지구에 부여한 운동들을 가정하고서 오랫동안 많은 관측을 한 결과, 다른 행성들의 운동을 지구의 회전과 관련지은 후 각 행성의 공전에 맞춰 계산해 본다면 행성들의 모든 현상이 그로부터 곧장 따라 나온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모든 행성들과 천구들, 또는 하늘 그 자체의 순서와 크기가 서로 너무도 밀접하게 묶여 있어서, 그것의 어떤 부분도 다른 모든 부분과 우주 전체를 교란하지 않고선 변경될 수 없다는 것도 발견했습니다. … [코페르니쿠스는 여기서 자신의 체계와 프톨레마이오스 체계의 가장 두드러진 차이를 지적하고 있다. 코페르니쿠스의 체계에서는 더 이상 다른 행성들을 고정시켜 둔 채 한 행성의 궤도만 마음대로 줄이거나 늘이는 것이 불가능하다. 처음으로 관측은 공간을 채우고 있는 천구들에 대한 가설에 의존하지 않고서도 모든 행성 궤도의 순서와 상대적인 크기를 결정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코페르니쿠스의 체계와 프톨레마이오스의 체계를 비교할 때 더 완전하게 논의할 것이다.]

제 판단을 뒷받침하기 위해 제시한 추론에 대해 재능 있고 학식 있는 수학자들이 이 분야에서 특히 요구되는 수준의 피상적이지 않은 철저한 이해와 검토를 한다면, 그들도 제 의견에 동의할 것임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제가 어떤 사람의 비판도 피하려 하지 않는다는 것을 학자들뿐만 아니라 교육받지 못한 자들에게도 보이기 위해, 저는 이 연구들을 다른 누구보다도 교황님께 헌정하려 합니다. 왜냐하면 제가 사는 지구의 이 외딴 구석에서까지 교황님께서는 교황청의 위엄뿐 아니라 글과 학문에 대한 당신의 애정으로 인해 최고의 권위를 누리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뒤에서 하는 비방에는 약이 없다’는 말이 있긴 하지만, 교황님께서는 당신의 영향력과 판단을 통해 비방가들의 험담을 막아 주실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수학에는 무지한 게으른 떠버리들은 그들의 목적에 맞게 비열하게 왜곡된 특정한 성서 구절을 가지고서 제 연구에 대한 판단을 내리려 할지 모릅니다. 그들이 아무리 제 연구에 대해 비난하고 트집을 잡더라도 저는 개의치 않을 것이며, 오히려 그들의 무모한 비판을 경멸할 것입니다. 저명한 작가이기는 하지만 절대 수학자라고는 할 수 없는 락탄티우스가 지구가 구형이라고 말한 사람들을 비웃으면서 지구의 모양에 대해 너무나도 유치한 얘기를 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따라서 제 지지자들은 그런 유의 사람들이 저를 비웃는다 해도 놀랄 필요가 없습니다.

수학은 수학자들을 위한 것이며, 제가 완전히 틀린 것이 아니라면, 수학자들은 저의 이러한 노력이 지금 교황님께서 수장으로 계신 기독교 왕국에도 무언가 기여를 하는 것으로 생각할 것입니다. 몇 해 전 교황 레오 10세 때 라테란 공회의에서 교회력을 개정하는 문제가 논의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는 결정을 내리지 못했는데, 그 이유는 단지 한 해와 한 달의 길이 및 태양과 달의 운동이 아직 충분히 정확하게 결정되어 있지 않다는 것뿐이었습니다. 당시 이 달력 문제를 담당했던 저명한 포솜브로네의 파울 주교(Paul, Lord Bishop of Fossombrone)[4]의 부탁을 받고, 저는 이들을 더욱 정확하게 관측하기 위해 정성을 쏟게 되었습니다. 제가 이 연구에서 성취한 것이 무엇인지는 학식 있는 모든 수학자들과 특히 교황님의 판단에 맡기겠습니다. 이 책의 유용성을 두고서 교황님께 제가 할 수 있는 것 이상을 약속드리는 것처럼 보이지 않도록 하기 위해, 이제 제 연구의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수학은 수학자를 위한 것입니다.” 여기에는 『회전에 관하여』의 가장 본질적인 부조화가 나타나 있다. 코페르니쿠스의 연구 결과에 의해 서구 사상의 거의 모든 측면이 오랫동안 영향을 받았지만, 그 연구 자체는 지극히 기술적이고 전문적이었다. 코페르니쿠스가 괴물 같음을 발견한 것은 수리 천문학이었지 우주론이나 철학이 아니었으며, 그가 지구를 움직이게 된 것은 순전히 수리 천문학의 개혁 때문이었다. 만약 동시대인들이 그를 따르려고 했다면, 그들은 행성의 위치에 관한 그의 상세한 수학적 논증들을 이해하는 법을 배워야 했을 것이며, 또한 자신들의 감각을 통해 얻은 일차적인 증거보다 이 난해한 논증들을 더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했을 것이다. 코페르니쿠스 혁명의 핵심은 행성의 위치를 계산하는 데 사용된 수학적 기법들의 혁명이 아니었지만, 그 혁명은 그러한 혁명으로 시작되었다. 이러한 새로운 기법들에 대한 필요를 인식하고 그 기법들을 개발함으로써, 코페르니쿠스는 그의 이름이 붙은 혁명에 자신의 단 한 가지 독창적인 기여를 하게 되었다.

코페르니쿠스는 지구의 운동을 처음으로 제안한 사람이 아니었으며, 그 생각을 자기 힘으로 재발견했다고 주장하지도 않았다. 서문에서 그는 지구가 움직이고 있다고 주장한 고대의 권위자들을 대부분 인용하고 있다. 초창기 원고에서 그는 자기 자신의 우주와 매우 흡사한 태양 중심의 우주를 제안한 아리스타르코스를 언급하기도 했다. 르네상스 시기의 관례에 따라, 지구가 움직이거나 움직일 수 있다고 믿었던 더 직접적인 선배들을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그는 분명 그들의 몇몇 연구들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오렘의 기여는 알지 못했더라도, 그는 아마도 15세기 추기경 쿠사의 니콜라스(Nicholas of Cusa)가 쓴 매우 영향력 있었던 논문은 적어도 들어 보았을 것이다. 그 논문에서 그는 무제한적인 신플라톤주의 우주 속에서 세계가 여럿이라는 가정으로부터 지구의 운동을 끌어냈다. 지구의 운동은 결코 대중적인 개념은 아니었지만, 16세기 무렵에는 사상 초유의 개념으로도 보기 어려웠다. 사상 초유였던 것은 코페르니쿠스가 지구의 운동 위에 세운 수학적 체계였다. 아마도 아리스타르코스를 제외하면, 코페르니쿠스는 지구의 운동이 기존의 천문학적 문제를, 사실은 어떤 종류가 되었든 과학적 문제를, 해결해 줄지도 모른다는 것을 깨달은 최초의 인물이었다. 아리스타르코스를 포함하더라도, 그는 지구의 운동에 따른 천문학적 귀결들을 상세하게 전개한 최초의 인물이었다. 코페르니쿠스의 수학은 그를 그의 선배들과 구별해 주며, 다른 이들의 연구에 의해서는 시작되지 않았던 혁명이 그의 연구에 의해 시작된 이유에는 그 수학도 포함되어 있었다.

코페르니쿠스의 물리학과 우주론

코페르니쿠스에게 지구의 운동은 행성들의 문제에 대한 부산물이었다. 그는 천체의 운동을 검토하는 과정에서 지구의 운동에 대해 배웠으며, 천체의 운동은 그에게 지극히 중요한 문제였기 때문에, 주로 지상의 문제에만 관심을 가진 일반인들이 그의 혁신 때문에 느끼게 될 어려움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코페르니쿠스는 그 자신만큼 전적으로 천문학적인 가치관을 가지지 않은 사람들에게 지구의 운동이 야기할 문제들을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었다. 그는 적어도 동시대인들이 지구의 운동을 상상할 수는 있도록 만들어야 했으며, 이 운동의 귀결들이 보통 생각하는 것만큼 그렇게 재앙적인 것은 아니란 것을 보여야 했다. 그래서 코페르니쿠스는 움직이는 지구를 수용할 수 있는 우주에 대한 비전문적인 스케치로 『회전에 관하여』의 문을 열었다. 그의 서론에 해당하는 제1권은 일반인을 겨냥해 썼으며, 천문학 훈련을 받지 않은 사람들도 이해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되는 모든 논증을 담고 있었다.

그 논증들은 전혀 설득력이 없었다. 제1권에서는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았던 수학적 분석들로부터 유도되는 논증을 제외하면, 그 논증들은 새롭지도 않았으며 코페르니쿠스가 그 다음 권들에서 전개할 천문학 체계의 세부 사항과 완전히 일치하는 것도 아니었다. 코페르니쿠스처럼 지구가 움직인다고 가정할 만한 다른 이유를 가진 사람만이 『회전에 관하여』 제1권을 온전히 진지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러나 제1권이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바로 그 약점들은 코페르니쿠스의 체계가 다음 권들의 상세한 수학적 논의를 따라갈 수 없었던 사람들에게 받게 될 의심과 조롱을 암시해 준다. 아리스토텔레스와 스콜라적인 개념들과 법칙들에 대한 계속된 의존은 코페르니쿠스조차도 자기 자신의 좁은 전문 분야를 제외하면 그가 받은 훈련과 그의 시대를 얼마나 조금밖에 벗어날 수 없었는지를 보여 준다. 마지막으로, 제1권의 불완전성과 부조화들은 전통 우주론과 전통 천문학의 응집력을 다시 한 번 예시해 준다. 코페르니쿠스는 천문학적인 동기만으로 혁명에 이끌려 어쩔 수 없이 자신의 혁신을 천문학에 제한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그 역시도 지구의 운동에 따른 파괴적인 우주론적 귀결들을 완전히 회피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제1권

1. 우주는 구형이다.

먼저 우리는 우주가 구형이라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그 이유는 그 형태가 접합부 없이 그 자체로 완전한 전체를 이루는 가장 완벽한 형태이기 때문일 수도 있고, 아니면 가장 큰 용적량을 가져서 모든 것을 담고 보존하기에 가장 적합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표면적이 주어졌을 때 모든 입체 중에서 구가 가장 큰 부피를 가진다]. 또는 우주의 완벽한 부분들인 태양, 달, 별이 모두 이러한 형태를 띠고 있기 때문일 수도 있고, 물방울이나 다른 액체 방울이 홀로 있을 때 보이는 모습처럼 세상 모든 것들이 이러한 모양으로 형성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어느 누구도 천상의 물체〔천구〕들이 그러한 형태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2. 땅도 역시 구형이다.

땅도 역시 구형인데, 왜냐하면 땅은 모든 방향에서 그 중심을 향해 움직이려 하기 [또는 떨어지기] 때문이다. … 임의의 지점에서 북쪽으로 이동할수록, 일주 운동의 중심축인 〔하늘의〕 북극은 점차 높아지는 반면 반대편 극은 그만큼 낮아진다. 그리고 〔지상의〕 북극 근처에서는 지지 않는 별들이 더 많이 보이게 되는 반면, 남쪽의 어떤 별들은 뜨지 않게 된다. … 게다가 극의 고도 변화는 항상 지상에서 움직인 거리에 비례하는데, 이는 구형이 아니고서는 일어날 수 없다. 그러므로 땅은 유한한 크기의 구가 분명하다. … [코페르니쿠스는 지구가 구형임을 뒷받침하기 위해 우리가 이미 살펴보았던 고전적인 자료들에서 전형적으로 등장하는 몇 가지 추가적인 논증들로 이 장을 마무리한다.]

3. 땅은 그 위의 물과 함께 어떻게 하나의 구체를 형성하는가.

땅을 둘러싼 물은 바다를 형성하며 땅의 깊고 우묵한 곳들을 메운다. 물의 양은 땅의 양보다 적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땅과 물 모두 자신들의 무게로 인해 동일한 중심을 향해 움직이려 하므로) 물이 땅을 완전히 삼켜 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즉, 그 덕분에 생명체들이 살아남고, 땅의 일부 구역들이 침수되지 않고, 또 수많은 섬들이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는 것이다. 사실 대륙 그 전체가 거대한 섬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

[이 장에서, 코페르니쿠스는 지구가 주로 땅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과 지구가 구형이 되기 위해 물과 땅이 함께 필요하다는 것을 보이고 싶어 한다. 아마도 그는 앞을 내다보고 있었을 것이다. 움직일 때 땅은 물보다 쉽게 부서지지 않으며, 고체 형태의 지구가 움직이는 것은 액체 형태의 지구가 움직이는 것보다 그럴듯하다. 또, 코페르니쿠스는 궁극적으로 지구가 둥글기 때문에 자연스레 원형으로 움직인다고 말할 예정이다(아래의 제1권 8장을 보라). 따라서 땅과 물 모두가 함께 지구의 자연스러운 운동에 동참할 수 있으려면, 그는 땅과 물 모두가 구체를 이루는 데 필수적이라는 것을 보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 부분은 코페르니쿠스가 지구의 구조에 대한 견해를 적으면서 최근의 항해를 통한 발견들과 그로 인해 프톨레마이오스의 지리학 저술들에 가해야 할 수정 사항들을 알고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는 점에서 특히 흥미롭다. 예를 들어, 그의 말에 따르면,

만약 지구가 주로 물로 이루어졌다면,] 해안으로부터 바깥으로 갈수록 바다는 끝없이 깊어져서, 뱃사람은 아무리 멀리 탐험하더라도 섬이나 암초와 같은 땅의 흔적을 전혀 볼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거대 대륙의 거의 중심부라고 할 수 있는 지중해와 홍해 사이의 거리가 기껏해야 15스타드〔약 2.7km〕밖에 안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반면, 프톨레마이오스는 『세계지(Cosmography)』에서 사람이 살 수 있는 지역을 반원[즉, 카나리아 제도부터 동쪽으로 180°에 이르는 반구에 걸친 땅]까지 확대시켰고, 그가 미지의 땅으로 남겨 둔 그 너머에서 현대인은 중국을 비롯해 경도 60°에 달하는 매우 광대한 지역을 발견했다. 그래서 현재 우리는 지구상에서 사람이 살 수 있는 지역이 바다를 위해 남겨진 부분보다 더 넓은 범위의 경도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만약 아메리카−이를 발견한 선장의 이름을 딴 육지−를 비롯해 오늘날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발견한 섬들을 더한다면 이는 더욱 명백해질 것이다. 아메리카는 그 미지의 크기로 인해 또 하나의 대륙으로 생각되며, 그 밖에도 아직까지 알려지지 않은 다른 섬들이 많이 남아 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정반대편에 대륙이 있고 그곳에 사람들이 거주한다 할지라도 그리 놀라지 않을 것이다. 기하학적 추론에 따르면 아메리카는 인도 갠지스 강 유역의 바로 정반대쪽에 위치한다. …

4. 천체들의 운동은 영원한 등속 원운동이거나 원운동들의 합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제 천체들의 운동이 원형이라는 점을 얘기할 것이다. 회전은 구의 자연스러운 운동이며, 그 운동을 통해 자신의 모습, 즉 세상에서 가장 단순한 형태가 나타난다. 그 형태에서는 시작도 끝도 찾아낼 수 없고, 같은 장소를 계속 돌고 있다면, 처음과 끝을 구별할 수 없을 것이다.

여러 천구가 존재하기 때문에, 많은 운동이 나타난다. 가장 명백한 것으로는 낮과 밤을 관장하는 … 일주 운동이 있다. 이 일주 운동에 의해 지구를 제외한 온 우주는 동쪽에서 서쪽으로 움직여 간다고 생각되었다. 시간 그 자체가 날의 수로 세어지기 때문에, 이 운동은 모든 운동의 공통된 척도로 간주된다. 다음으로 우리는 이 일주 운동과 반대로 서쪽에서 동쪽으로 도는 다른 회전들도 보게 된다. 태양과 달, 그리고 다섯 행성이 그러한 반대되는 운동을 한다. …

그러나 이 천체들의 운동은 여러 면에서 다른 특성을 보인다. 첫째, 그들은 일주 운동의 축을 중심으로 회전하지 않고 황도를 따라 비스듬하게 회전한다. 둘째, 그들은 자신의 궤도를 규칙적으로 이동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 태양과 달은 어떤 때는 느려지고 어떤 때는 빨라지는 것이 관찰되지 않는가? 게다가 다섯 행성은 때때로 멈추고 심지어 뒤로 가기도 한다. … 게다가, 때때로 이들은 지구에 가까워지는데 이때를 ‘근지점(近地點, Perigee)’에 있다고 하고, 또 어떤 때는 멀어지기도 하는데 이때를 ‘원지점(遠地點, Apogee)’에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불규칙성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천체들의 운동이 원형 또는 여러 원의 합성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불규칙성들은 일정한 법칙에 따라 주기적으로 되풀이되기 때문이다. 이는 원운동이 아니고서는 일어날 수 없는데, 원운동만이 물체를 원래의 장소로 다시 데려다줄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태양은 원운동의 조합으로 낮과 밤의 길이 변화와 사계절의 변화를 반복해서 만들어 낸다. 이 불규칙한 운동에는 여러 운동이 결합해 있을 수밖에 없는데, 왜냐하면 하나의 단순한 천체가 하나의 원 위에서 불규칙하게 움직이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만일 그렇다면, 그러한 불규칙성은 (내적인 원인 때문이든 외적인 원인 때문이든) 원동력이 일정하지 않았거나 회전하는 물체의 형태가 변화했기 때문에 나타났을 것이다. 그러나 둘 중 어느 것도 우리는 받아들일 수 없으며,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질서로 구성된 것들에게 그러한 결함을 상상하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다.

따라서 태양과 달과 행성들의 운동이 불규칙해 보이는 것은 그들이 회전하는 축의 방향이 다양하기 때문이거나, 아니면 지구가 그들이 회전하는 원의 중심이 아니어서 지구상에 있는 우리에게 [그들의 궤도를 따라 움직이는] 이 천체들의 위치 변화가 [광학(또는 일상적인 관찰. 배나 마차는 언제나 더 가까이 있을수록 점점 더 빨리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다)으로 증명되었듯이] 지구에서 멀 때보다 가까울 때 더 크게 보이기 때문일 수 있다. 그렇다면, 하나의 천구의 동일한 [각] 운동들이 다른 거리에서 볼 때는 같은 시간에 다른 거리를 움직인 것처럼 보일 것이다. 그러므로 천상의 물체들을 탐구하면서, 우리 바로 곁에 있는 것들을 알아채지 못하고 지구에 속한 것을 천체에 돌리지 않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하늘과 지구의 관계를 주의 깊게 관찰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 코페르니쿠스는 천체들의 운동을 원으로 제한하는 전통적인 논증 가운데 우리가 이미 검토했던 것들 중 가장 완전하고 강력한 버전을 제공하고 있다. 그는 오직 균일한 원운동 또는 그러한 운동의 조합만이 고정된 주기로 일어나는 모든 천체 현상의 규칙적인 반복을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여태까지 코페르니쿠스의 모든 논증은 아리스토텔레스적이거나 스콜라적이며, 그의 우주는 전통적인 우주론의 우주와 구별되지 않는다. 몇몇 측면에서 그는 그의 많은 선배들과 동시대인들보다도 더 아리스토텔레스적이다. 예를 들어, 그는 천구의 균일한 대칭적 운동에 위배되는 이퀀트를 사용하는 데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급진적인 코페르니쿠스는 지금까지 자신을 철저히 보수적인 모습으로 드러냈다. 그러나 그는 지구의 운동을 도입하는 것을 더 이상 미룰 수 없다. 그는 이제 전통과의 단절을 고려해야 한다. 그리고 아주 이상하게도, 바로 이 부분에서 코페르니쿠스는 전통에 대한 의존을 가장 분명하게 드러낸다. 반대로 그는 여전히 최대한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에 가까운 입장을 고수한다. 5장을 시작하면서, 그리고 8장과 9장에서 운동에 대한 일반적인 논의를 마치면서, 코페르니쿠스는 천체들과 마찬가지로 땅[지구]도 구이기 때문에, 땅 역시 그가 보기에 구에게 자연스러운 운동인 합성된 원운동에 참여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5. 땅은 원운동을 하는가? 그리고 그 위치는?

앞에서 지구가 구형이라는 것을 보였으므로, 이제 우리는 지구 역시 그 형태에 걸맞은 운동을 하는지와 지구가 우주에서 어떤 장소를 차지하고 있는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이를 모르고서는 천체 현상에 대한 적절한 이론을 만들어 낼 수 없다. 현재 권위자들은 지구가 우주의 중심에 정지해 있다는 데 동의하고 있으며, 그에 반대되는 견해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으로, 심지어는 말도 안 되는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 그러나 더 면밀하게 살펴본다면, 이 문제는 아직 해결되지 않았으며 더 폭넓은 고찰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물체의 위치 변화가 보이는 것은 관찰 대상이나 관찰자 중 하나가 운동을 하거나 혹은 둘의 운동이 차이가 있을 때다(왜냐하면 같은 방향으로 동일하게 움직이는 물체 사이에는 아무런 운동도 지각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천상의 반복된 회전을 보고 있는 곳은 지구다. 만약 지구가 어떤 운동을 한다면, 그 운동은 지구 바깥의 모든 물체들에게 나타날 것이고, 그들은 반대 방향으로 움직이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먼저 일주 운동부터 살펴보자. 일주 운동에 의해 지구와 그 부속물들을 제외한 온 우주는 매우 빨리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만약 하늘 대신 지구가 서쪽에서 동쪽으로 돈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그리고 그것을 가지고 진지하게 숙고한다면, 태양, 달, 별, 행성이 뜨고 지는 것이 실제로는 이런 경우라는 것을, 즉 나의 결론이 옳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하늘은 모든 것을 담고 있으며 모든 것에 장소를 제공하고 있다. 담은 것 대신 담긴 것이 움직이면 왜 안 되며, 장소를 제공하는 것 대신 장소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 움직이면 왜 안 되는가? (키케로에 따르면) 이는 바로 피타고라스주의자인 헤라클레이데스와 에크판토스, 그리고 시라쿠사의 히케타스의 생각이었다. 그들 모두는 지구가 우주의 중심에서 회전한다고 생각했으며, 별들이 지는 것은 땅이 가로막기 때문이고, 가로막던 땅이 비키면 별들이 다시 뜬다고 믿었다.

만약 이것[지구의 운동 가능성]이 받아들여진다면, 역시 중요한 문제인 지구의 위치에 대한 문제가 제기된다. 물론 거의 모든 사람은 지금까지 지구가 우주의 중심에 있다고 생각해 왔다. [사실, 지구가 조금이라도 움직일 수 있다고 한다면, 어쩌면 지구는 우주의 중심에서 도는 단순한 축 회전 이상의 운동을 할 수도 있다. 어쩌면 지구는 아예 중심에서 떨어진 곳에서 움직일 수도 있으며, 정말로 그렇다고 가정할 만한 좋은 천문학적 이유들이 몇 가지 있다.] 지구가 정확한 중심이 아니라 중심에서 어느 정도 떨어져 있고, 중심에서 지구까지의 거리가 항성 천구[와의 거리]에 비해서는 무시할 정도로 작지만 태양과 다른 행성들의 천구[까지의 거리]에는 비할 만하다고 가정해 보자. 그리고 그들[의 운동]이 정말로 균일하고 지구의 중심이 아닌 어떤 다른 중심 주위로 돈다고 가정하고서, 그들의 겉보기 운동에서 나타나게 될 변화들을 계산해 보자. 그러면 우리는 어쩌면 이 변화무쌍한 운동들의 불규칙성에 대한 합당한 원인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행성들이 어떤 때는 지구에 더 가까워 보이고 또 어떤 때는 더 멀어 보인다는 사실로부터, 지구의 중심이 행성 궤도의 중심이 아니라는 점은 분명해진다. 행성이 지구에 접근했다 멀어지는 것인지, 지구가 행성에 접근했다 멀어지는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러므로 지구가 일주 운동 말고도 또 다른 운동을 한다고 주장해도 이는 불합리하지 않을 것이다. 플라톤이 그를 보기 위해 이탈리아까지 찾아갔다는 얘기가 전해질 정도로 대단한 수학자였던 피타고라스주의자 필롤라오스는 지구가 자전 말고도 여러 운동을 하며 떠도는 하나의 행성일 뿐이라고 생각했다고 전해진다.

여기서 코페르니쿠스는 움직이는 지구의 개념이 천문학자들에게 주는 가장 직접적인 장점을 지적하고 있다. 만약 지구가 자신의 축을 중심으로 회전하면서 중심의 주위를 원형 궤도를 따라 움직인다면, 적어도 정성적으로는, 행성이 황도를 따라 도는 데 걸리는 시간의 불규칙성과 행성의 역행 운동이 주전원의 사용 없이 설명될 수 있다. 코페르니쿠스의 체계에서 행성 운동의 주된 불규칙성들은 겉보기에만 그럴 뿐이다. 움직이는 지구에서 보면, 실제로는 규칙적으로 움직이는 행성이 불규칙하게 움직이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이러한 이유에서 코페르니쿠스는 우리가 지구의 궤도 운동을 믿어야 한다고 느끼게 된다. 그러나 매우 이상하게도, 일반 독자가 이해할 수 있는 책의 부분들에서, 코페르니쿠스는 이 점을 그가 위에서 보여 준 것보다 더 분명하게 보여 주지는 않는다. 다른 곳에서 언급한 다른 천문학적 장점들도 보여 주지 않는다. 그것들을 정성적으로 보여 주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닌데도, 그는 비수학적인 독자에게 그것들을 당연한 것으로 간주해 달라고 부탁한다. 『회전에 관하여』의 이후 권들에서야 그는 자신의 체계가 가진 실제 장점을 보여 주는데, 거기서 그는 일반적인 역행 운동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행성의 역행 운동이 가진 난해한 정량적 세부 사항을 다루기 때문에, 오직 천문학에 입문한 사람만이 앞서 언급한 천문학적 장점들이 무엇을 의미했는지 알아낼 수 있었다. 코페르니쿠스의 은밀한 설명은 의도한 것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과거에 그는 자연의 비밀들을 수학 연구(와 그 밖의 신비스런 의식들)에 의해 사전에 정화되지 않은 사람들에게 알려 주지 말 것을 명한 피타고라스주의 전통에 동의를 조금 표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어쨌든, 그 은밀성은 그의 연구가 수용된 방식을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된다.

다음 두 절에서 그는 지구의 운동에 따른 천문학적 귀결들을 상세하게 다루지만, 우리는 우선 코페르니쿠스의 물리학과 우주론에 대한 전반적인 그림을 완성해야 한다. 6장 ‘지구의 크기에 비해 엄청나게 큰 하늘의 광대함에 대해’를 잠시 생략함으로써, 우리는 코페르니쿠스가 관대한 독자들에게 중심 주위를 도는 지구의 운동이 천문학적 논증들에 의해 필요해진다고 가정해 줄 것을 요청한 이후에 그 운동을 물리적으로 합당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 애쓰는 핵심 장들로 넘어가게 된다.

7. 고대인들은 왜 땅이 우주 한가운데에 중심처럼 정지해 있다고 믿었는가.

고대의 철학자들은 갖가지 … 방법으로 땅〔지구〕이 우주 한가운데에 정지해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노력했다. 가장 강력한 논증은 무거움과 가벼움의 원리로부터 나왔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흙〔땅〕은 가장 무거운 원소이고, 무게를 가진 모든 것은 그것의 중심을 향해 움직이려는 경향 때문에 땅을 향해 움직인다. 땅〔지구〕은 구형이고, 무거운 물체들은 (모든 방향에서) 땅을 향해 수직으로 움직이므로, 그들 모두는 지표면에서 멈추지 않았다면 중심에 함께 모여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중심을 향해 움직이는 물체들은 그곳에 도달하면 거기에 정지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면 전체 지구는 우주의 중심에 더욱 더 정지해 있을 것이다. 또한 지구는 떨어지는 물체들을 모두 받기 때문에, 그 무게로 인해 지구는 계속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또 다른 논증은 운동의 본성에 대한 가정에 기초해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하나의 단순한 물체는 단순한 운동을 한다. 단순한 운동에는 직선운동과 원운동이 있고, 다시 직선운동에는 위로 향하는 운동과 아래로 향하는 운동이 있다. 그 결과 모든 단순한 운동은 중심에 가까워지는, 즉 아래로 향하는 운동이나, 중심으로부터 멀어지는, 즉 위로 향하는 운동이나, 중심 주위를 도는, 즉 원운동 중 하나여야만 한다. [즉, 아리스토텔레스주의와 스콜라주의 물리학에 따르면, 자연스러운 운동, 다시 말해 외부의 밀침 없이 일어날 수 있는 운동은 운동 중인 물체의 본성에 의해 야기된다. 단순한 물체(다섯 원소−흙, 물, 공기, 불, 에테르) 각각의 자연스러운 운동은 그 자체로 단순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단순한 혹은 기초적인 본성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구형 우주 안에는 오직 세 가지 (기하학적으로) 단순한 운동만 존재한다. 중심을 기준으로 한 상향 운동, 하향 운동, 원형 운동이 그것이다.] 아래로, 즉 중심을 향해 움직이는 것은 무거운 원소인 흙과 물만의 성질이다. 반대로 가벼운 원소인 공기와 불은 중심에서 멀어져 위로 움직인다. 따라서 이 네 원소에는 직선운동이 부여되어야 한다. 그러나 천체들에는 원운동이 부여된다. 지금까지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얘기다.

프톨레마이오스는 만약 지구가 움직인다면 일주 운동만 한다 하더라도 위에서 말한 것과 반대의 결과가 일어났을 것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24시간 만에 지구를 한 바퀴 회전시키려면 그 운동은 엄청나게 맹렬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매우 빠르게 회전하는 물체는 결합하기 어려우며, 결합해 있더라도 서로 단단히 붙어 있지 않는 한 산산조각으로 흩어지기 쉽다. 그래서 프톨레마이오스에 따르면, 지구는 오래전에 산산이 부서져 (완전히 터무니없긴 하지만) 하늘에서 아예 사라졌을 것이다. 모든 생명체를 비롯해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다른 무거운 물체들 역시 지구 표면에 가만히 있지 못하고 날아가 버렸어야 한다. 또한 수직으로 떨어지는 물체들은 그 아래의 예정된 장소에 도달하지 못할 텐데, 왜냐하면 그 사이에 그 아래에 있는 땅도 빠르게 움직일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구름과 같이 공기 중에 떠 있는 모든 것은 항상 서쪽으로 움직이는 것으로 보일 것이다. [코페르니쿠스가 프톨레마이오스의 원래 논증을 상당히 정교하게 발전시켰다는 점에 주의할 것. 프톨레마이오스가 이 정도까지 밀고 나갔을지는 전혀 분명치 않다.]

8. 이 논증들의 불충분함과 그에 대한 반박

이를 비롯해 그와 유사한 이유들로, 그들은 지구가 분명히 우주의 중심에 정지해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만약 누군가가 지구가 움직인다고 말한다면, 동시에 그는 그 운동이 강제된 운동[혹은 외부의 밀침에 의한 것]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운동이라고 말하는 셈이다.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일은 강제로 일어나는 일과 반대되는 결과를 산출한다. 어떤 힘이나 강제력을 서서히든 순간적으로든 받는 것들은 반드시 부서지게 되어 있어 오래 유지될 수 없다. 그러나 자연스러운 본성에 의해 존재하는 것들은 질서 잡힌 최선의 상태로 유지될 수 있다. [즉, 만약 지구가 조금이라도 움직인다면, 지구가 그런 운동을 하는 것은 지구의 자연스러운 본성 때문일 것이고, 자연스러운 운동은 파괴적일 수 없다.]

따라서 인위적인 작용과는 차원이 다른 운동인 자연스러운 회전 때문에 지구와 그 위의 모든 것이 산산이 흩어질 것이라는 프톨레마이오스의 걱정은 기우다. 그렇다면 우주에 대해서는 더 많이 걱정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늘은 지구보다 크기 때문에 훨씬 더 빠른 속도로 움직여야 하기 때문이다. 그 격렬한 운동 때문에 하늘은 그렇게 커져 버린 것일까? 그래서 만약 정지한다면 하늘은 붕괴하게 될까? 만약 그렇다면, 하늘의 크기는 무한대가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 운동에 의해 하늘이 더욱 확대될수록, 24시간 내에 돌아야 할 거리가 점점 늘어나게 되므로 운동 속도는 더욱 빨라질 것이고, 운동 속도가 빨라지면 다시 하늘의 크기도 커져야 하기 때문이다. 즉 속도와 크기는 서로를 무한히 증가시킬 것이다. …

그들은 또 하늘 너머에는 어떠한 물체도, 공간도, 심지어는 진공도 없다고, 즉 완전히 아무것도 없다고 말하는데, 그렇다면 [위에서 얘기한 것처럼] 하늘이 늘어날 공간도 없다. 그러나 무언가가 무(無)에 의해 지탱될 수 있다면 그야말로 이상한 일이다. 그러나 만약 하늘이 무한하면서 그 안의 둥근 하늘 부분만 유한할 뿐이라고 한다면, 하늘 바깥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말이 어쩌면 좀 더 이해할 수 있는 얘기가 될 것이다. 이 경우 어떤 크기의 것이든 모든 것이 하늘 안에 있게 되지만, 하늘은 움직이지 않는다. …

그러면 우주가 유한한지 무한한지에 대한 질문은 자연철학자들에게 맡겨 두자. 대신 지구가 유한한 구체라는 것은 확실하다. 그렇다면 그 한계를 알지 못하고 또 알 수도 없는 우주 대신 지구에 그것의 [구] 형태에 자연스러운 운동을 부여하는 것을 왜 주저해야 하는가? 또한 일주 운동이 겉보기에는 하늘에 속하지만 실제로는 지구에 속한다는 것을 왜 받아들이지 않는가? 이는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Aeneas)>에서 “항구를 떠나 항해를 시작하자, 육지와 도시들이 후퇴한다”라고 말한 것과 매우 유사하다. 배가 고요하게 떠서 움직일 때, 선원들에게 바깥의 모든 것들은 배의 운동을 대신해서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는 반면, 자신과 선상의 모든 물건은 정지해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마찬가지로 지구의 운동도 분명 전 우주가 회전하는 느낌을 낼 수 있다.

구름을 비롯해 공기 중에 떠 있거나 공기 중에서 가라앉거나 떠오르는 물체들에 대해서는 뭐라고 말해야 할까? 분명 땅과 그 위의 물뿐 아니라 상당량의 공기와 그처럼 땅에 결부된 것들은 모두 위에서 말한 대로 움직일 것이다. 어쩌면 땅 부근의 공기는 흙성 물질이나 물성 물질의 혼합물을 함유하고 있어서 흙과 동일한 자연 법칙을 따를지도 모르며, 아니면 공기는 땅에 근접해 있어서 영원히 회전하는 땅으로부터 저항 없이 운동을 전달받았을 수도 있다. …

우리는 떨어지거나 올라가는 물체가 우주적 틀에서 보면 이중의 운동이라는 점을, 즉 직선운동과 원운동의 합성 결과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이는 일찍이 오렘이 얘기했던 분석이다.] 자신의 무게 때문에 아래로 떨어지는 물체들, 즉 주로 흙 성분으로 이루어진 물체들은, 틀림없이 그들이 속해 있던 전체와 같은 본성을 계속 유지하고 있을 것이다. … [따라서 예를 들어 돌은 땅에서 분리되더라도 계속 땅과 함께 원으로 돌면서 동시에 지표면을 향해 직선으로 떨어질 것이다. 그 알짜 운동은 회전 중인 돌림판의 중심을 향해 직선으로 기어가는 벌레의 운동처럼 일종의 나선 모양이 될 것이다.]

따라서 단순한 물체가 단순한 운동을 해야 한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원운동에서만 참이며, 이마저도 그 단순한 물체가 자신의 자연스러운 장소와 상태에 있을 때에만 성립한다. 그 상태에서는 원운동 말고는 어떠한 운동도 가능하지 않다. 왜냐하면 그러한 원운동은 정지해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전적으로 자기 자신 안에서 유지되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직선운동은 물체가 자연스러운 장소에서 멀어지거나 밀려났을 때 부가된다. 그런데 어떤 물체가 자신의 적절한 장소에서 벗어나 있다면 이는 우주의 전체적인 질서와 형태에 부합하지 않는 일이다. 따라서 직선운동은 자기 자신의 적절한 장소에 있지 않거나 자신의 본성에 완벽하게 합치되어 있지 않을 때, 즉 물체가 자신의 전체로부터 분리되어 그 통일성을 잃었을 때에만 나타난다. …

[코페르니쿠스의 논증은 지구가 행성이 될 때 지상계와 천상계 사이의 전통적인 구분이 얼마나 빨리 사라져야 하는지를 보여 준다. 왜냐하면 그는 여기서 천체들에 관한 전통적인 논증을 지구에 적용하고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원운동은, 단순하든 합성된 것이든, 정지해 있는 것에 가장 가깝다. 여태껏 하늘의 자연스러운 운동이었듯이, 원운동은 지구에도 자연스러울 수 있다. 왜냐하면 그 운동은 우주의 관찰된 통일성과 규칙성을 파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반면, 직선운동은 자신의 장소에 도달한 어떤 물체에게도 자연스러울 수 없다. 왜냐하면 선형운동은 파괴적이며, 우주를 파괴하는 자연스러운 운동이란 말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부동의 상태는 변화와 불안정한 상태보다 고귀하고 신성하다고 생각되므로, 후자의 상태는 우주보다 지구에 적합하다. 또한 담겨 있으면서 장소를 차지하고 있는 것, 즉 지구 대신, 그것들을 담고 있으면서 그것들에 장소를 제공하는 것이 운동을 한다는 것은 정말 불합리해 보이지 않는가?

마지막으로, 행성은 지구에 가까워졌다 멀어졌다 하기 때문에, 이에 따르면 하나의 물체는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들의 생각에] 지구가 차지하고 있는 중심 주위를 도는 운동뿐 아니라 안팎으로 오가는 운동도 하게 된다. [이는 지구의 중심적 위치를 끌어내는 데 사용된 바로 그 법칙들을 위반한다. 왜냐하면 이 법칙들에 따르면 행성들은 오직 단 하나의 운동만 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중심 주위를 도는 이 운동은 더 일반적인 방식으로 재해석될 필요가 있으며, 우리는 이러한 모든 운동이 모종의 중심을 가진다는 것에 만족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모든 것을 고려할 때, 지구는 정지해 있기보다 움직이는 것이 더 그럴듯하다. 특히 일주 운동은 바로 그런 경우로, 그 운동은 지구의 속성으로 간주될 수 있다.

9. 하나보다 많은 운동이 지구에 부여될 수 있는가와 우주의 중심에 대해.

지구가 운동을 하면 안 될 이유가 하나도 없기 때문에, 우리는 이제 지구가 하나보다 많은 운동을 가지는지, 그래서 하나의 행성으로 간주될 수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지구가 모든 [행성] 회전의 중심이 아니라는 점은 행성들의 불규칙한 운동과 지구로부터의 거리 변화를 통해 증명된다. 만약 그들이 지구를 중심으로 한 동심원을 돈다면 이는 일어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우주에는 하나보다 많은 중심이 있으며[즉, 모든 궤도 운동의 중심, 지구 자체의 중심, 그리고 어쩌면 그 밖의 다른 중심들], 그렇기 때문에 우주의 중심이 지구의 무게중심인지 아닌지를 논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제 나는, 무거움이라는 것이 창조자에 의해 각 부분들이 구의 형태로 결합해 통일성과 전체성을 가질 수 있도록 부분들에 부여된 자연스러운 경향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우리는 이러한 성질이 태양, 달, 다른 행성들에도 존재하고, 그 덕분에 그들이 저마다 다양한 경로에도 불구하고 구 형태를 유지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렇다면 만약 지구가 자신의 중심에서 회전하는 것 말고도 다른 운동을 한다면, 그 운동은 [지구는 지금 상당히 많은 측면에서 행성처럼 보이기 때문에] 연주 운동을 하는 바깥의 많은 [행성] 운동들과 비슷해야 할 것이다. 만약 태양을 정지시키는 대신 태양의 운동을 지구에 넘긴다면, 별들이 아침저녁으로 뜨고 지는 것은 변하지 않겠지만, 행성들의 정지점과 역행과 순행은 그들의 운동 때문이 아니라 지구의 운동 때문에 일어나는 것으로 간주될 것이며, 그들의 겉보기 운동은 이를 반영할 뿐인 것이 된다. 결국 우리는 태양을 우주의 중심에 놓아야 할 것이다. 이 모든 것은 행성들의 체계적인 운행 원리와 온 우주의 조화를 통해 설명할 수 있다. 단, 그것은 우리가 이른바 “두 눈을 뜨고서” 사실을 직시할 때에만 보일 것이다.

이 마지막 세 장에서, 우리는 코페르니쿠스의 운동 이론을 보게 되는데, 이는 그가 지구와 태양의 자리를 바꾸면서도 본질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우주를 해체하지는 않도록 설계한 개념 체계다. 코페르니쿠스의 물리학에 따르면, 천상계와 지상계의 모든 물질은 자연스레 모여 구를 형성하고, 그러면 구는 자기 자신의 본성에 의해 돌게 된다. 자신의 자연스러운 위치에서 벗어난 물질의 일부분은 직선 운동으로 자신의 자연스러운 장소로 돌아가는 동시에 구와 함께 계속 돌 것이다. 이는 몹시 비일관된 이론이며(이에 대해서는 6장에서 더 자세히 보여 줄 것이다), 그중 가장 비일관된 부분만 제외하면 그리 독창적이지도 않은 이론이다. 코페르니쿠스가 이를 스스로 재발명했을 가능성도 있긴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그의 비판과 그의 운동 이론 모두 그 대부분의 핵심적인 요소들은 앞선 스콜라 학자들에게서, 특히 오렘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그것들은 보다 제한된 오렘의 원래 문제에 적용될 때에나 덜 허황돼 보였다.

지구의 운동에 대한 적절한 물리적 토대를 제공하는 데 실패했다는 것이 코페르니쿠스의 오점이 되진 않는다. 그가 지구의 운동을 상상하거나 받아들인 것은 물리학에서 온 이유들 때문이 아니었다. 제1권에서 그렇게 대충 다루어진 물리적이고 우주론적인 문제는 그에 의해 만들어진 문제이긴 하지만, 실제로는 그의 문제가 아니다. 할 수 있었다면 그는 그 문제들을 모조리 회피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코페르니쿠스의 물리학에서 나타난 부족한 점들은 그의 천문학적 혁신의 귀결이 그 혁신을 이끈 천문학적 문제를 어떤 방식으로 초월하는지 잘 보여 주며, 그 혁신의 저자가 그의 연구를 통해 태어난 혁명을 스스로 얼마나 조금밖에 소화하지 못했는지 잘 보여 준다. 전통적인 아리스토텔레스적 우주에서 움직이는 지구는 비정상적인 것이었지만, 『회전에 관하여』의 우주는 모든 면에서 전통적이었으며, 코페르니쿠스에게 그 우주는 지구의 운동과 양립 가능해 보일 수 있었다. 그가 스스로 말하듯이, 태양의 운동은 단순히 지구로 이전되었다. 태양은 하나의 별일 뿐 아니라 유일한 중심의 물체로서 우주는 그것을 중심으로 건설된다. 태양은 지구의 오래된 기능들을 물려받으면서 그 밖에 몇몇 새로운 기능도 가진다. 곧 보겠지만, 코페르니쿠스의 우주는 여전히 유한하며, 여전히 모든 행성은 동심 천구들에 의해 돌려진다. 그러나 그 천구들은 더 이상 바깥 천구에 의해 돌려질 수 없는데, 바깥 천구는 이제 정지해 있기 때문이다. 모든 운동은 원들의 합성이어야 했으며, 지구를 움직였음에도 코페르니쿠스는 주전원을 버릴 수 없었다. 알다시피, 코페르니쿠스 혁명은 『회전에 관하여』에서 거의 찾아볼 수 없으며, 그 점은 바로 그 책의 두 번째 본질적인 부조화다.

코페르니쿠스 천문학−2구체

우리는 코페르니쿠스의 제1권을 다 끝낸 것이 아니다. 바로 앞 절에서 인용한 부분 뒤에 바로 이어지는 10장과 11장은 더 천문학적인 문제에 가까운 문제를 다루고 있으며, 우리는 그것을 천문학적 논의의 맥락에서 살펴볼 것이다. 그러나 그 논의는 코페르니쿠스가 일반 독자도 이해할 수 있도록 만든 논증을 넘어선다. 코페르니쿠스의 글을 이후 절에서도 다시 짧게 살펴보겠지만, 우선 우리는 왜 일반인들보다 천문학자들이 코페르니쿠스의 제안에 더 깊은 인상을 받았을지 알아볼 것이다. 그것은 제1권 어디에서도 거의 발견할 수 없다.

코페르니쿠스는 지구에 세 가지 원운동을 동시에 부여했다. 일주 운동, 연주 운동, 축의 원뿔형 연주 운동이 그것이다. 동향 일주 운동은 별, 태양, 달, 행성들에 의해 그려지는 겉보기 일주권들을 설명해 주는 운동이다. 만약 지구가 항성 천구의 중심에 놓여 있고, 그 자신의 남북을 관통하는 축을 중심으로 매일 동쪽 방향으로 회전한다면, 정지해 있거나 항성 천구를 기준으로 거의 정지해 있는 모든 물체는 지평선 위에서 원호를 그리며 서쪽으로 움직이는 것처럼 보일 것이며, 그 원호들은 임의의 짧은 시간 동안 관찰된 각 천체들의 운동과 거의 똑같을 것이다.

만약 이러한 결과에 대한 코페르니쿠스나 오렘의 논증이 이해하기 어렵다면, 그림 6그림 7에 그려진 별의 궤적을 다시 보라. 그 궤적들은 고정된 관찰자가 바라보고 있는 별의 원운동(프톨레마이오스의 설명)에 의해서도, 고정된 별을 바라보고 있는 관찰자의 회전(코페르니쿠스의 설명)에 의해서도 산출될 수 있었다. 혹은 그림 26에 그려진 새로운 2구체 우주를 봐도 된다. 이 그림은 2구체 우주에서 별들의 운동을 논의하는 데 우리가 처음 사용했던 그림(그림 11)을 단순화한 복사본으로, 이 새로운 버전은 극들이 천구가 아니라 지구에 있고 그 회전 방향이 반대라는 점만 다르다. 이와 같은 다이어그램을 처음 사용했을 때, 우리는 지구와 관찰자와 지평면을 고정시켜 둔 채 항성 천구를 서쪽으로 돌렸다. 이제 우리는 바깥 천구를 고정시켜 둔 채 지구, 관찰자, 지평면을 함께 동쪽으로 돌려야 한다. 지평면의 중심에 서서 그와 함께 움직이는 관찰자는 그가 하늘에서 볼 수 있는 것만으로는 둘 사이에 아무런 차이도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두 경우 모두 그는 별들과 행성들이 지평면의 동쪽 테두리를 따라 나타나서 동일한 원형 경로 상에 있는 서쪽 지평선을 향해 머리 위로 움직이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그림 26. 고정된 항성 천구의 중심에서 회전하는 지구. 그림 11과 이 다이어그램을 비교할 때, 여기서는 지평면이 지구와 함께 돌게 되기 때문에 그것과 움직이는 관찰자 O 사이의 기하학적 관계는 변하지 않는다는 점에 주의해야 한다.

지금까지 우리는 회전하는 지구를 정지해 있는 항성 천구의 중심에 계속 두었다. 즉, 헤라클레이데스나 오렘이 제안했던 우주 모형을 살펴본 것이다. 그러나 이는 코페르니쿠스의 우주로 가는 첫 단계에 불과하며, 다음 단계는 더욱 급진적일 뿐 아니라 더욱 어렵다. 이미 인용한 5장에서 코페르니쿠스가 지적했듯이, 만약 우리가 지구의 운동 가능성을 조금이라도 인정할 준비가 되어 있다면, 우리는 중심에서의 운동뿐 아니라 중심에서 벗어난 지구의 운동까지 고려할 각오도 해야 한다. 사실, 코페르니쿠스에 따르면, 움직이는 지구는 꼭 중심에 있을 필요가 없다. 지구는 중심에 비교적 가까이에 있기만 하면 되며, 중심에 충분히 가까이 머물러 있는 한 지구는 별의 겉보기 운동에 영향을 주지 않은 채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있다. 이는 천문학적 훈련을 받은 그의 동료들에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결론이었다. 왜냐하면 상식과 지상계 물리학에만 기댄 지구의 부동성 관념과 달리, 지구가 정중앙의 위치에 있다는 관념은 천문학적 관찰로부터 직접적으로 도출될 수 있는 것 같기 때문이다. 따라서 중심에서 벗어난 지구라는 코페르니쿠스의 관념은 처음에는 순수한 천문학적 관찰의 직접적인 귀결들과 충돌하는 것처럼 보였고, 바로 이러한 충돌을, 혹은 우리가 다음 절 끝에서 살펴볼 그와 밀접하게 연관된 충돌을, 피하기 위해 코페르니쿠스는 항성 천구의 크기를 엄청나게 키울 수밖에 없었으며 이는 그의 후계자들이 발전시킨 무한 우주 관념으로 가는 첫걸음이 되었다. 지구의 위치에 대한 코페르니쿠스의 논의는 그의 책 제1권 6장에 등장한다. 여기서 우리에겐 더 쉽고 포괄적인 버전이 필요할 것이다.

항성 천구 안에서 지구가 정중앙의 위치에 있다는 것은 지상의 어떤 관찰자라도 그의 지평면이 항성 천구를 이등분한다는 관찰로부터 도출될 수 있는 것 같다. 예를 들어, 춘분점과 추분점은 항성 천구상의 두 대척점으로, 두 점은 항성 천구의 두 대원인 적도와 황도의 교점으로 정의된다. 관찰에 따르면, 이 점 중 하나가 동쪽 지평선 위로 막 떠오를 때마다, 항상 다른 하나는 서쪽에서 막 지고 있다. 이는 항성 천구상의 다른 어떤 대척점 쌍을 고려하든 마찬가지로, 하나가 뜰 때 다른 하나는 진다. 이러한 관찰은 오직 그림 26이나 앞의 그림 11처럼 지평면이 항성 천구의 중심을 관통하도록 그려져서 그 천구를 대원으로 가로지를 경우에만 설명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지평면이 항성 천구를 대원으로 가로지를 경우, 그리고 오직 그 경우에만, 그 천구상의 대척점이 항상 같은 순간에 뜨고 질 것이다.

그러나 모든 지평면은 구형의 지구에 접하게도 그려져야 한다. (우리는 그림 26과 그림 11에서 이러한 구성을 지키지 않았는데, 이는 단지 우리가 거기서 지구의 크기를 엄청나게 과장해서 그렸기 때문이다). 따라서 관찰자는 항성 천구의 중심 혹은 그 바로 근처에 있어야 한다. 지구의 전체 표면 자체는 중심 혹은 그 바로 근처에 있어야 하고, 즉 지구는 매우 작아서 거의 점과 같아야 하며, 중심에 위치해 있어야 한다. 만약 그림 27에서처럼 (안쪽 동심원으로 표현된) 지구가 항성 천구에 비해 큰 편이거나, 혹은 (이번엔 검은 점으로 표현된) 지구가 작더라도 중심에서 벗어나 있다면, 지평면은 항성 천구를 이등분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을 것이고, 그 천구상의 대척점은 함께 뜨고 지지 못할 것이다.

 
그림 27. 만약 지구의 지름이 항성 천구의 지름에 비해 상당한 크기를 가지거나 지구가 중심에서 상당히 벗어나 있다면, 지평면은 항성 천구를 이등분하지 못한다.

여기서 전개한 것처럼, 이 논증 자체는 코페르니쿠스에 의해 활용된 약한 고리를 분명하게 보여 준다. 관찰은 지구가 하나의 점이거나(만약 그렇다면, 아리스토텔레스적 우주와 프톨레마이오스적 우주조차도 관찰과 충돌할 것이다) 정확히 중심에 있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 주지 않는다. 왜냐하면 관찰은 예컨대 정확히 추분점이 질 때 춘분점이 뜬다는 것을 결코 말해 줄 수 없기 때문이다. 대강의 맨눈 관찰은 춘분점이 막 지고 있을 때 추분점이 지평선 부근에 있다는 것을 보여 줄 것이다. (대기에 의한 굴절과 실제 지평선의 불규칙성에 대해 적절하게 보정된) 정밀한 맨눈 관찰은 동지점이 막 서쪽 지평선에 도달했을 때, 하지점이 동쪽 지평선에서 6′ (또는 0.1°) 이내에 있다는 것을 보여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떠한 맨눈 관찰도 이보다 나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한 관찰은 지평면이 항성 천구를 거의 정확하게 이등분하며 따라서 지상의 모든 관찰자들이 우주의 중심에 매우 가까이 있어야 한다는 것만을 보여 줄 수 있을 뿐이다. 지평면이 항성 천구를 정말 얼마나 정확하게 이등분하는지와 지상의 관찰자가 중심에 정말 얼마나 가까이 있는지는 관찰의 정확성에 달려 있을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우리가 하지점과 동지점 중 하나가 지평선 위에 있을 때마다 다른 하나가 지평선에서 0.1° 이내에 있다는 것을 관찰을 통해 알고 있다면, 지상의 어떤 관찰자도 항성 천구의 중심에서 그 반지름의 0.001 거리보다 멀리 떨어져 있을 수 없을 것이다. 혹시 만약 관찰이 우리에게 하지점과 동지점 중 하나가 지평선 위에 있을 때 다른 하나가 지평선에서 0.01° 이내에 있다는 것을 말해 준다면(근사적으로도 이렇게 좋은 맨눈 관찰은 거의 없다), 그림 27의 안쪽 구는 바깥 구 반지름의 0.0001보다 큰 반지름을 가질 수 없을 것이고, 또 전체 지구는 언제나 그 안쪽 원 내부의 어딘가에 있어야 한다. 만약 지구가 안쪽 원 바깥에서 움직였다면, 지평면은 항성 천구를 0.01° 이내에서 이등분하지 못했을 것이고, 가상의 우리 관찰은 그 차이를 발견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구가 안쪽 원 내부 어디든 그 안에 있기만 한다면, 지평면은 관찰의 한계 내에서 항성 천구를 이등분하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이것이 바로 코페르니쿠스의 논증이다. 관찰은 우리에게 지구가 항성 천구와 같은 중심을 가진 작은 구 안쪽 어딘가에 있다는 것만을 알려 줄 뿐이다. 안쪽 구 내부에서 지구는 보이는 것들에 영향을 주지 않은 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다. 특히, 지구는 중심 혹은 중심의 태양 주위로 궤도 운동을 할 수도 있다. 그 궤도가 지구를 중심에서 너무 멀리 벗어나게만 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그리고 “너무 멀리”는 “바깥 천구의 반지름에 비해 너무 멀리”라는 뜻일 뿐이다. 만약 바깥 천구의 반지름을 알고 있다면, 그 정확성이 알려진 관찰은 지구 궤도 반지름의 최대 한계를 설정해 준다. 만약 지구 궤도의 크기를 알고 있다면(이론적으로 이 값은 아리스타르코스의 지구ᐨ태양 거리 측정 기법에 의해 결정될 수 있다), 그 정확성이 알려진 관찰은 항성 천구 크기의 최소 한계를 설정해 준다. 예를 들어, 만약 지구와 태양 사이의 거리가 상세 부록에서 묘사된 아리스타르코스의 측정에 따라 764지구지름(1528지구반지름)과 같다면, 그리고 관찰이 0.1° 이내로 정확하다는 것이 알려져 있다면, 항성 천구의 반지름은 적어도 지구 궤도 반지름의 1000배, 또는 적어도 지구 반지름의 1,528,000배가 되어야 한다.

우리의 예시는 꽤 유익하다. 코페르니쿠스의 관찰은 이 정도까지 정확하지 않았지만, 그를 곧바로 계승한 브라헤의 관찰은 오히려 0.1°보다 더 정확했기 때문이다. 우리의 예시는 항성 천구의 최소 크기에 대한 16세기 코페르니쿠스주의자의 대표적인 추정치인 셈이다. 원리적으로는, 그 결과에는 이상한 점이 아무것도 없는데, 16, 17세기에는 항성 천구까지의 거리를 측정하는 직접적인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 반지름은 1,500,000지구반지름보다 클지도 몰랐다. 그러나 항성 천구가 그렇게 크다면−그리고 코페르니쿠스주의는 그럴 것을 요구했다−우리는 전통적인 우주론과의 진정한 단절을 받아들여야 한다. 예를 들어, 알파르가니는 항성 천구의 반지름을 20,110지구반지름으로 추정했는데, 이는 코페르니쿠스의 추정치보다 75배 이상 작은 값이다. 코페르니쿠스의 우주는 전통적인 우주론의 우주보다 엄청나게 커야 한다. 그 부피는 최소한 400,000배가 된다. 토성 천구와 항성 천구 사이에는 엄청난 크기의 공간이 존재한다. 전통적인 우주에서 겹겹의 천구들이 가졌던 깔끔한 기능적 정합성이 훼손되었지만, 황당하게도 코페르니쿠스는 이러한 단절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 같다.

코페르니쿠스 천문학−태양

코페르니쿠스의 논증은 엄청나게 커진 우주에서 지구의 궤도 운동을 허용해 주지만, 그 궤도 운동이 태양과 다른 행성들의 관찰된 운동들과 양립 가능하다는 것을 보일 수 없다면 이는 소용이 없다. 이러한 운동들을 코페르니쿠스는 그의 책 제1권 10장과 11장에서 다룬다. 우리는 11장에 대한 상세한 주해로 시작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 장에서 코페르니쿠스는 지구의 궤도 운동을 묘사하고 그에 따른 태양의 겉보기 위치를 살펴본다. 일단 우주의 중심과 태양과 지구의 궤도가 모두 그림 28에 그려진 대로 일치한다고 가정해 보자. 다이어그램에서 황도면은 북천극의 위치에서 바라본 것이고, 항성 천구는 정지해 있으며, 지구는 궤도를 따라 1년에 한 바퀴씩 동쪽으로 규칙적으로 여행하면서, 동시에 23시간 56분에 한 바퀴씩 자전축을 중심으로 동쪽으로 돈다. 지구의 궤도가 항성 천구보다 훨씬 작다고 한다면, 지구의 자전은 별들의 일주권뿐 아니라 태양, 달, 행성들의 일주권을 정확하게 설명해 줄 것이다. 왜냐하면 지구 궤도의 어떤 위치에서 보더라도 이 모든 천체들은 항성 천구를 배경으로 보일 수밖에 없고, 지구가 돌면 항성 천구와 함께 움직이는 것처럼 보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림 28. 지구가 코페르니쿠스식 궤도를 따라 E1에서 E2로 움직이면서, 중심의 태양 S의 겉보기 위치는 항성 천구를 배경으로 S1에서 S2로 이동한 것처럼 보인다.

다이어그램에서 지구는 30일 간격의 두 위치에 표시되어 있다. 각 위치에서 태양은 항성 천구로 이루어진 배경 위에서 보이고, 태양의 두 겉보기 위치는 황도 위에 있어야 한다. 단 그 황도는 이제 지구의 공전면(태양을 포함한 평면)이 항성 천구와 교차하는 선으로 새롭게 정의된다. 그러나 다이어그램에서 지구가 E1의 위치에서 E2의 위치로 동쪽으로 움직임에 따라, 태양은 겉보기에 S1의 위치에서 S2의 위치로 황도를 따라 동쪽으로 움직이게 된다. 따라서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은 태양이 황도를 따라 동쪽으로 도는 연주 운동을 프톨레마이오스의 이론과 정확히 똑같이 예측해 준다. 또한 이 이론은, 곧바로 알게 되겠지만, 계절에 따른 태양의 고도 변화도 똑같이 예측해 준다.

 
그림 29. 코페르니쿠스식 궤도를 도는 지구의 연주 운동. 언제나 지구의 자전축은 자기 자신 또는 태양을 관통하도록 그려진 고정된 직선과 평행한 상태로 유지된다. 북반구 중위도 지역의 관찰자 O는 정오의 태양이 동지 때보다 하지 때 훨씬 더 머리 바로 위에 있는 것을 보게 된다.

그림 29는 추분점 약간 북쪽에 있는 천구상의 점에서 바라본 지구의 궤도를 보여 준다. 지구는 순서대로 지나가는 춘분점, 하지점, 추분점, 동지점의 네 위치에 그려져 있다. 지구가 운동하는 동안 네 위치 모두에서, 지구의 자전축은 황도면의 수직선에서 23.5° 기울어진 채 태양을 관통하는 가상의 선과 평행한 상태로 유지된다. 다이어그램에서 두 개의 작은 화살표는 하지와 동지인 6월 22일과 12월 22일 북반구 중위도 지역의 정오에 있는 지상의 관찰자의 위치를 나타낸다. (다이어그램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은) 태양에서 지구를 향하는 선은 정오의 햇빛이 오는 방향을 보여 주며, 태양은 분명 동지 때보다 하지 때 더 관찰자의 머리 바로 위에 있게 된다. 비슷한 방식으로 춘분과 추분 및 그 사이의 태양 고도도 결정된다.

따라서 계절에 따른 태양의 고도 변화는 그림 29에 의해 완전하게 규명될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프톨레마이오스 방식의 설명으로 되돌아가는 것이 더 간단하다. 코페르니쿠스 체계에서 태양은 모든 계절에 별들 사이에서 프톨레마이오스의 체계와 똑같은 위치를 차지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태양은 두 체계 모두에서 똑같은 별들과 함께 뜨고 져야 한다. 황도상의 태양의 겉보기 위치와 계절 사이의 상관관계는 이 전환의 영향을 받을 수 없다. 태양과 별들의 겉보기 운동에 관한 한 두 체계는 동등하며, 프톨레마이오스 체계가 더 간단하다.

마지막 다이어그램은 코페르니쿠스의 체계가 가진 두 가지 추가적인 특징도 밝혀 준다. 별들의 일주권을 산출하는 것은 바로 지구의 자전이기 때문에, 지구의 자전축은 항성 천구상의 그 원들의 중심을 가리켜야 한다. 그러나 다이어그램이 보여 주듯이, 지구의 자전축은 1년 동안 항성 천구상의 정확히 똑같은 점을 결코 가리키지 않는다.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에 따르면 지구 자전축의 연장선은 1년 동안 항성 천구 위에 두 개의 작은 원을 천구의 북극과 남극 부근에 하나씩 그린다. 혹은, 같은 얘기를 관찰에 더 밀접하게 연관된 방식으로 말하자면, 각 별들은 1년 동안 항성 천구 상에서(혹은 관찰된 천구의 극에 비추어) 위치가 살짝 변하는 것처럼 보여야 한다.

 
그림 30. 별의 연주 시차. 지구가 궤도를 따라 도는 동안 지상의 관찰자와 고정된 별을 잇는 직선이 자기 자신과 정확히 평행한 상태로 유지되지 않기 때문에, 천구 상에서 별의 겉보기 위치는 6개월 동안 각도 p만큼 움직여야 한다.

이 겉보기 운동은 시차 운동이라 일컬어지는데, 맨눈으로는 볼 수 없으며 1838년까지는 망원경으로도 보이지 않았다. 지구 궤도 상의 대척점과 별을 잇는 두 직선이 정확히 평행하지 않기 때문에(그림 30), 지구에서 바라본 별의 겉보기 각위치가 계절에 따라 달라져야 했다. 그러나 별까지의 거리가 지구 궤도의 직경보다 매우 많이 크다면, 시차 각, 즉 그림 30의 p는 매우 작을 것이고, 별의 겉보기 위치 변화는 식별되지 않을 것이다. 시차 운동은 별이 지구의 궤도 크기에 비해 매우 멀리 떨어져 있을 때에만 보이지 않는다. 이 상황은 우리가 위에서 왜 지구의 자전이 지평면과 항성 천구의 교선을 변화시키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지를 살펴볼 때 논의했던 것과 정확히 똑같다. 사실, 우리는 똑같은 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 버전의 문제는 더 중요한 문제로, 왜냐하면 지평선 근처에서 지평선이 항성 천구를 이등분하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필요한 별의 위치를 정확하게 측정하는 것은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위에서 논의된 분점들의 출몰과 달리, 시차 운동에 대한 탐색은 지평선에 제한될 필요가 없다. 따라서 시차는 지구의 궤도 크기에 비해 항성 천구가 최소한 얼마나 커야 하는지에 대해 지평선의 위치가 제공하는 것보다 훨씬 더 예민한 경험적 검사를 제공하며, 위에서 언급한 항성 천구의 크기에 대한 코페르니쿠스식 추정들은 실제로는 시차에 대한 논의로부터 도출되었어야 한다.

그림 29를 살펴봄으로써 밝혀지는 두 번째 사항은 하늘과는 전혀 상관이 없으나 코페르니쿠스와는 상관이 있다. 지금까지 우리는 그 다이어그램의 궤도 운동을 지구의 자전축이 태양을 통과하는 고정된 직선과 항상 평행한 상태로 유지된 채 지구의 중심이 태양 중심의 원을 따라 움직이는 단일한 운동처럼 묘사했다. 코페르니쿠스는 똑같은 물리적 운동을 동시에 일어나는 두 가지 수학적 운동으로 구성된 것으로 묘사한다. 이는 그가 지구에 총 세 가지 원운동을 부여한 이유다. 그리고 그가 이렇게 묘사한 이유는 그의 사고가 얼마나 전통적인 아리스토텔레스적 사고방식에 묶여 있었는지를 보여 주는 또 하나의 중요한 본보기를 제공한다. 그에게 지구는 중심의 지구 주위를 따라 태양을 실어 나르는 데 사용되었던 과거의 천구와 정확히 똑같은 천구에 의해 중심의 태양 주위를 따라 운반되는 행성인 것이다. 만약 지구가 천구에 단단하게 고정되어 있다면, 그 자전축은 태양을 관통하는 똑같은 직선과 항상 평행하게 유지될 수 없을 것이며, 대신 그 자전축은 천구의 회전에 따라 함께 움직이게 되어 그림 31a에 그려진 자세를 취할 것이다. 지구가 태양을 중심으로 180° 돌고 난 후, 지구의 자전축은 여전히 수직선에서 23.5° 기울어져 있겠지만 그 기울어진 방향은 처음과는 반대 방향이 되어 있을 것이다. 지구를 실어 나르는 천구의 회전에 의해 야기되는 이러한 자전축의 방향 변화를 원상태로 돌리기 위해 코페르니쿠스에게는 제3의 원운동이 필요한데, 이 운동은 지구의 자전축에만 적용되며 그림 31b에 그려져 있다. 이는 원뿔형 운동으로, 자전축의 북쪽 끝을 1년에 한 바퀴씩 서쪽으로 옮겨 줌으로써 궤도 운동이 자전축에 미치는 영향을 정확히 상쇄해 준다.

 
그림 31. 코페르니쿠스의 ‘제2’와 ‘제3’의 운동. 제2의 운동은 회전 중인 태양 중심의 천구에 고정된 행성의 운동으로, (a)에 그려져 있다. 이 운동은 지축을 자기 자신과 평행한 상태로 유지시켜 주지 않기 때문에, 이 축을 일렬로 되돌리기 위해서는 (b)에 그려진 원뿔 형태의 제3의 운동이 필요하다.

코페르니쿠스 천문학−행성들

지금까지 코페르니쿠스가 전개한 개념 체계는 프톨레마이오스의 체계만큼만 효과적이지만, 분명 더 효과적이진 않으며, 훨씬 복잡해 보인다. 그가 이룬 혁신의 진정한 토대가 조금이라도 분명해지는 것은 코페르니쿠스의 우주에 행성들이 추가될 때뿐이다. 예를 들어, 코페르니쿠스가 서론에 해당하는 제1권 5장 말미에 별다른 논의 없이 넌지시 언급한 역행 운동에 대한 설명을 생각해 보자. 프톨레마이오스 체계에서 각 행성의 역행 운동은 그 행성을 기본 주전원 위에 놓고 다시 그 주전원의 중심은 그 행성의 주원에 의해 지구 주위를 돌게 함으로써 설명된다. 이 두 원의 결합된 운동은 3장에서 살펴본 특유의 루프형 패턴을 만든다. 코페르니쿠스 체계에서는 어떠한 기본 주전원도 필요하지 않다. 행성이 별들 사이에서 거꾸로 혹은 서쪽으로 움직이는 것은 황도를 따라 도는 태양의 겉보기 운동처럼 지구의 궤도 운동에 의해 만들어진 겉보기 운동일 뿐이다. 코페르니쿠스에 따르면 프톨레마이오스가 기본 주전원들로 설명했던 운동은 실제로는 지구의 운동으로, 스스로 정지해 있다고 생각한 지상의 관찰자가 이를 행성들에 부여했을 뿐이었다.

 
그림 32. (a) 외행성과 (b) 내행성의 역행 운동에 대한 코페르니쿠스의 설명. 각 다이어그램에서 지구는 궤도 위에서 E1에서 E7까지 꾸준히 움직이고, 행성은 P1에서 P7까지 움직인다. 동시에 항성 천구를 배경으로 한 행성의 겉보기 위치는 1부터 7까지 동쪽으로 이동하지만, 두 행성이 지나치는 3부터 5까지는 잠시 동안 서쪽 방향으로 역행 운동이 발생한다.

코페르니쿠스의 주장의 근거는 그림 32a와 32b에 명확하게 표현되어 있다. 항성 천구에 의해 제공되는 고정된 배경을 기준으로 움직이는 지구에서 바라본 움직이는 외행성의 순차적인 겉보기 위치들은 첫 번째 다이어그램에 그려져 있고, 두 번째 다이어그램은 내행성의 순차적인 겉보기 위치들을 보여 준다. 궤도 운동만 표시되어 있을 뿐, 태양과 행성과 별들 모두의 빠른 겉보기 서향 운동을 산출하는 지구의 일주 운동은 생략되어 있다. 두 다이어그램 모두 태양 중심의 원형 궤도에서 지구의 순차적인 위치는 점 E1, E2, …, E7으로 표시되어 있고, 그에 상응하는 행성의 순차적인 위치는 P1, P2, …, P7으로 표시되어 있으며, 그에 따른 행성의 겉보기 위치들은 지구에서부터 행성을 통과하도록 그은 직선을 항성 천구와 만날 때까지 연장함으로써 알 수 있는데, 이들은 1, 2, …, 7로 표시되어 있다. 두 경우 모두 더 안쪽에 있는 행성은 궤도를 더 빨리 돈다. 다이어그램을 자세히 살펴보면, 별들 사이를 다니는 행성의 겉보기 운동이 1부터 2, 2부터 3까지는 정상(동쪽 방향)이고, 그다음 3부터 4, 4부터 5까지는 뒤로(서쪽으로) 가는 것처럼 보이며, 마지막으로 5부터 6, 6부터 7까지는 진행 방향을 다시 바꾸어 정상적으로 움직이는 것을 알 수 있다. 지구가 궤도의 남은 부분을 마저 도는 동안 행성은 정상적인 운동을 계속하며, 동쪽으로 가장 빨리 움직이는 것은 행성이 지구와 태양 맞은편에 있을 때다.

따라서 코페르니쿠스의 체계에서 지구에서 바라본 행성들은 대부분의 시간 동안 동쪽으로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고, 더 빠른 궤도 운동을 하는 지구가 그들을 앞지르거나(외행성) 그들이 지구를 앞지를 때(내행성)에만 역행 운동이 나타난다. 역행 운동은 그 운동을 관찰 중인 행성이 지구와 가장 가까울 때에만 일어날 수 있고, 이는 관찰과 부합한다. 적어도 외행성들은 그들이 서쪽으로 움직일 때 가장 밝다. 이렇게 행성 운동의 첫 번째 주된 불규칙성은 주전원의 사용 없이 정성적으로 설명되었다.

 
그림 33. 외행성이 황도를 따라 한 바퀴를 완주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 매번 달라지는 것에 대한 코페르니쿠스의 설명. 행성이 자기 궤도를 따라 P에서 P까지 동쪽으로 한 바퀴 움직이는 동안, 지구는 E1에서부터 동쪽으로 1.25바퀴를 돌아 E1을 지나 E2까지 움직인다. 이 기간 동안 별들 사이에서 보이는 이 행성의 겉보기 위치는 1에서 2까지 동쪽으로 한 바퀴에 살짝 못 미치게 움직인다. 이 행성의 다음 바퀴 동안 지구는 E2에서 시작해서 E2를 지나 E3까지 움직이기 때문에, 별들 사이에서 보이는 행성의 겉보기 위치는 2에서 시작해서 2를 지나 다시 1까지 황도 한 바퀴를 살짝 넘게 돌게 된다.

그림 33은 코페르니쿠스의 제안이 행성 운동의 두 번째 주된 불규칙성−행성이 황도를 한 바퀴 돌 때마다 걸리는 시간의 차이−을 어떻게 설명해 주는지 보여 준다. 다이어그램에서는 행성, 이 경우에는 외행성이 궤도를 따라 동쪽으로 한 바퀴 도는 동안 지구가 궤도를 따라 동쪽으로 1.25바퀴를 돈다고 가정한다. 일련의 관찰이 시작될 때, 지구는 E1, 행성은 P에 있다고 가정해 보자. 그때 행성은 역행 중이고 고정된 항성 천구를 배경으로 보면 1에서 그 실루엣이 보인다. 행성이 궤도를 한 바퀴 돌아 P로 돌아왔을 때, 지구는 궤도를 1.25바퀴 돌아 E2에 도착하게 된다. 따라서 행성은 시작할 때의 1번 위치보다 서쪽에 있는 2에서 보이게 된다. 행성은 아직 황도를 한 바퀴 다 돌지 못한 상황이고, 따라서 황도를 도는 그 첫 바퀴는 행성이 자기 궤도를 한 바퀴 도는 데 걸리는 시간보다 더 많이 걸릴 것이다.

행성이 궤도를 따라 두 번째 바퀴를 돌면, 지구는 궤도를 또다시 한 바퀴 넘게 돌아 E3에 도달하게 되고 행성은 다시 P에 돌아온다. 이번에 행성은 2번 위치보다 동쪽에 있는 3에서 실루엣이 보이게 된다. 행성은 자기 궤도를 따라 딱 한 바퀴 도는 동안 황도를 따라서는 한 바퀴 넘게 돌게 되고, 따라서 황도를 도는 그 두 번째 바퀴는 매우 빠른 여정이다. 세 번째 바퀴를 돈 후 행성은 다시 P에 있지만, 3의 동쪽인 4번 위치에서 보이게 되고, 따라서 황도를 도는 행성의 이번 바퀴 역시 빠른 여정이다. 궤도를 따라 네 번째 바퀴를 돈 후 행성은 다시 4의 서쪽인 1에서 보이게 되고, 따라서 이 마지막 바퀴는 느린 여정이다. 이 행성은 자기 궤도 네 바퀴와 황도 네 바퀴를 동시에 완주했다. 따라서 외행성이 황도를 도는 데 걸리는 평균 시간은 행성의 궤도 공전 주기와 동일하다. 그러나 매 바퀴를 돌 때 걸리는 시간은 그 평균보다 상당히 많을 수도 상당히 적을 수도 있다. 비슷한 논증은 내행성의 운동에서 나타나는 비슷한 불규칙성도 설명해 줄 것이다.

역행 운동과 황도를 한 바퀴 도는 데 걸리는 시간의 변동은 고대의 천문학자들로 하여금 행성들의 문제를 다루는 데 주전원과 주원을 도입하게 만들었던 행성의 두 가지 중대한 불규칙성이다. 코페르니쿠스의 체계는 이 똑같은 중대한 불규칙성을 설명해 주며, 그 설명에 주전원을, 적어도 기본 주전원을 사용하지 않는다. 행성의 겉보기 운동에 대한 근사적이고 정성적인 설명만 하더라도 히파르코스와 프톨레마이오스는 12개의 원이 필요했다. 태양과 달은 각각 하나씩, 나머지 다섯 ‘떠돌이들’은 각각 둘씩 필요했다. 코페르니쿠스는 행성의 겉보기 운동에 대한 똑같은 정성적 설명을 단 7개의 원만으로 해냈다. 그는 알려진 여섯 행성−수성, 금성, 지구, 화성, 목성, 토성−에 대해 각각 하나의 태양 중심의 원과, 달에 대해 하나의 추가적인 지구 중심의 원만 필요했다. 행성의 운동에 대한 정성적인 설명에만 관심을 가진 천문학자가 있다면 그에게 코페르니쿠스의 체계는 더 경제적으로 보일 것이다.

코페르니쿠스 체계의 이러한 명백한 경제성은 새로운 천문학의 옹호자들이 거의 빠뜨리지 않고 강조한 선전 문구이지만, 그것의 상당 부분은 착각에 불과하다. 우리는 아직 코페르니쿠스의 행성 천문학의 완전한 복잡성을 하나도 다루지 않았다. 『회전에 관하여』 제1권에서 제시한 7원 체계와 코페르니쿠스 체계에 대한 현대의 많은 기초적 설명들은 놀랍도록 경제적이지만, 그 체계는 작동하지 않는다. 그것은 프톨레마이오스의 체계에 필적하는 정확성으로 행성의 위치를 예측할 수 없다. 그 체계의 정확성은 프톨레마이오스 체계의 단순화된 12원 버전의 정확성과 비슷하다. 즉, 코페르니쿠스는 행성 운동에 대해 프톨레마이오스보다 경제적인 정성적 설명을 제공할 수 있다. 그러나 행성 위치의 변화에 대한 상당히 좋은 정량적 설명을 얻기 위해 프톨레마이오스는 근본적인 12원 체계를 미세 주전원, 이심원, 이퀀트로 복잡하게 만들 수밖에 없었다. 코페르니쿠스도 미세 주전원과 이심원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완전한 체계의 복잡성은 프톨레마이오스의 체계와 별반 차이가 없었다. 두 체계는 모두 30개가 넘는 원을 사용했고, 경제성 면에서 우열을 가리기 어려웠다. 두 체계의 우열은 정확성을 가지고도 가릴 수 없었다. 코페르니쿠스가 원을 추가하는 일을 끝냈을 때, 그의 복잡한 태양 중심 체계는 프톨레마이오스의 체계만큼 정확한 결과를 제공했지만, 그보다 정확한 결과를 주진 못했다. 코페르니쿠스는 행성들의 문제를 풀지 못한 것이다.

 
그림 34. (a) 지구와 (b) 화성의 운동에 대한 코페르니쿠스의 설명. (a)의 경우 태양은 S에 있고, 지구 E는 점 OE를 중심으로 원을 돌며, 점 OE는 점 O를 중심으로 느리게 돌고, 다시 점 O는 태양 중심의 원 위에서 돈다. (b)의 경우 화성은 점 OM을 중심으로 한 주원 위를 도는 주전원 위에 있고, 점 OM은 지구 궤도의 움직이는 중심 OE와 일정한 기하학적 관계를 유지한다.

완전한 코페르니쿠스 체계는 『회전에 관하여』의 이후 권들에 묘사되어 있다. 다행히도 우리는 거기서 전개된 복잡성의 유형들만 살펴봐도 된다. 예를 들어, 코페르니쿠스의 체계는 실제로는 전혀 태양 중심 체계가 아니었다. 태양이 황도상의 겨울 별자리들을 지나는 동안 그 속도가 빨라지는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코페르니쿠스는 지구 궤도의 중심을 태양의 중심에서 벗어난 곳에 둠으로써 지구의 원형 궤도를 이심원으로 만들었다. 다른 불규칙성들을 설명하기 위해, 그는 그 이심을 계속 움직이게 했다. 지구의 이심원의 중심은 또 다른 원 위에 놓여 있고, 그 원의 운동에 의해 지구의 이심은 그 이탈 정도와 방향이 계속 변화한다. 지구의 운동을 계산하기 위해 사용된 최종 체계는 그림 34a에 근사적으로 나타나 있다. 이 다이어그램에서, 태양 S는 공간상에 고정되어 있으며, 점 O는 태양을 중심으로 느리게 돌고 있고, 그 점을 중심으로 느리게 도는 또 다른 원은 지구의 움직이는 이심 OE를 운반하고 있다. 지구는 E에 있다.

비슷한 복잡성은 다른 천체들의 관찰된 운동을 설명하는 데도 필요했다. 달의 경우 코페르니쿠스는 총 세 개의 원을 사용했는데, 첫 번째 원의 중심은 움직이는 지구에 있었고, 두 번째 원의 중심은 첫 번째 원의 움직이는 원주 위에 있었으며, 세 번째 원의 중심은 둘째 원의 원주 위에 있었다. 화성을 비롯한 다른 행성들의 경우, 그는 그림 34b에 그려진 것과 매우 비슷한 체계를 사용했다. 화성 궤도의 중심 OM은 지구의 중심 OE와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며 그와 함께 움직인다. 행성은 이심원 위가 아닌 주전원 위의 M에 놓여 있는데, 이 주전원은 이심원과 똑같은 방향과 주기로 동쪽으로 돈다. 복잡성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각 행성이 황도로부터 벗어나는 남북 편차를 설명하기 위해서도 여전히 다른 장치들이 필요했고, 이들은 프톨레마이오스의 것과 완전히 동등했다.

코페르니쿠스가 행성의 위치를 계산하기 위해 사용한 상호 연결된 원들의 복잡한 체계를 이렇게 간략하게 살펴본 것만으로도 우리는 『회전에 관하여』의 세 번째 거대한 부조화와 코페르니쿠스 필생의 업적이 가진 커다란 역설을 확인할 수 있다. 『회전에 관하여』의 서문은 프톨레마이오스 천문학의 부정확성, 복잡성, 비일관성에 대한 강력한 고발로 시작했지만, 책이 끝나기도 전에 그 서문은 자기 자신에게 정확히 똑같은 죄목의 유죄 선고를 내리게 되었다. 코페르니쿠스의 체계는 프톨레마이오스의 체계보다 더 단순하지도 더 정확하지도 않다. 그리고 코페르니쿠스가 자신의 체계를 구성하는 데 사용한 방법은 프톨레마이오스의 방법과 마찬가지로 행성들의 문제에 대한 단일하고 일관된 해법을 전혀 산출하는 것 같지 않다. 『회전에 관하여』는 그 체계의 현존하는 단 하나의 초기 버전인 그의 초기 원고 『코멘타리오루스』와도 일관되지 않다. 코페르니쿠스조차도 자신의 가설로부터 상호 연결된 원들의 유일한 조합을 끌어낼 수 없었으며, 그 후계자들도 그러지 못했다. 코페르니쿠스로 하여금 급진적인 혁신을 시도하게 만들었던 고대 전통의 그러한 특징들은 그 혁신에 의해 제거되지 않았다. 코페르니쿠스는 “이[천문학]에 대한 수학자들의 연구가 서로 일치하지 않는다”는 발견 때문에, 그리고 “그들이 도입한 가설들이 잘못되지 않았다면, 그로부터 따라 나오는 모든 귀결도 반드시 참될 것이기” 때문에 프톨레마이오스 전통을 거부했다. 새로운 코페르니쿠스라면 그에게 똑같은 논증의 화살을 돌렸을지도 모른다.

코페르니쿠스 체계의 조화

순수하게 실용적인 근거로만 판단하자면, 코페르니쿠스의 새로운 행성 체계는 실패작이었다. 그 체계는 그것의 프톨레마이오스적 선배들보다 더 정확하지도 훨씬 단순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그 새로운 체계는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는 일부 코페르니쿠스 후계자들에게 태양 중심의 천문학이 행성들의 문제를 푸는 열쇠임을 정말로 확신시켰고, 이들은 결국 코페르니쿠스가 찾던 단순하고 정확한 해법을 내놓았다. 그들의 작업은 다음 장에서 살펴보겠지만, 우선 우리는 왜 그들이 코페르니쿠스주의자가 되었는지 알아보아야 한다. 즉 경제성이나 정확성의 향상이 없었던 상황에서, 지구와 태양의 자리를 바꿀 무슨 이유가 있었던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를 가득 채운 전문적인 세부 사항들로부터 쉽게 분리되지 않는데, 코페르니쿠스 자신도 깨달았듯이, 태양 중심 천문학의 진짜 호소력은 실용적인 면이 아닌 미적인 면에 있었기 때문이다. 천문학자들에게 코페르니쿠스 체계와 프톨레마이오스 체계 사이의 선택은 처음에는 단지 취향의 문제일 수 있었고, 취향의 문제는 정의하거나 논쟁하기 가장 어려운 문제다. 그러나 코페르니쿠스 혁명 자체가 보여 주듯이, 취향의 문제는 무시할 수 없다. 기하학적 조화를 식별할 능력을 갖춘 자는 코페르니쿠스의 태양 중심 천문학이 가진 새로운 깔끔함과 정합성을 감지할 수 있었고, 만약 그 깔끔함과 정합성이 인식되지 않았다면 혁명은 일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그림 35. 내행성의 제한된 이각에 대한 (a) 프톨레마이오스 체계와 (b) 코페르니쿠스 체계의 설명. 프톨레마이오스 체계에서는, 주전원의 중심을 지구와 태양 사이의 직선 위에 계속 유지시킴으로써 태양 S와 행성 P 사이의 각을 제한해야 한다. 코페르니쿠스 체계에서는, 그 행성의 궤도가 지구의 궤도 안쪽에 완전히 포함됨으로써 그러한 제한은 전혀 필요치 않다.

우리는 코페르니쿠스의 체계가 가진 미적 장점들 중 하나를 이미 살펴보았다. 그 체계는 행성 운동의 주요 정성적 특징들을 주전원을 사용하지 않고서 설명해 준다. 특히 역행 운동은 태양 중심 궤도의 기하학적 구조에 따른 자연스럽고 직접적인 귀결로 바뀌게 된다. 그러나 정량적인 정확성보다 정성적인 깔끔함을 훨씬 더 중시하는 천문학자들(그런 천문학자는 소수였으며, 갈릴레오는 그중 하나였다)만이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에서 정교하게 발전시킨 주전원과 이심원들로 이루어진 복잡한 체계를 보고서도 이를 설득력 있는 근거로 간주할 수 있었을 것이다. 다행히도 새로운 체계를 옹호하는 논증 중에는 다른 것도 있었는데, 이들의 수명은 더 길었다. 예를 들어, 새로운 체계는 내행성의 운동에 대해 프톨레마이오스의 체계보다 단순하고 훨씬 더 자연스러운 설명을 제공한다. 수성과 금성은 절대로 태양에서 아주 멀리 떨어지지 않으며, 프톨레마이오스 천문학은 이러한 관찰을 설명하기 위해 수성, 금성, 태양의 주원들을 한데 묶어 둠으로써 각 내행성의 주전원 중심이 항상 지구와 태양을 잇는 직선 위에 놓이도록 했다(그림 35a). 주전원의 중심을 이렇게 맞추는 것은 “별도의” 장치로, 지구 중심 천문학의 기하학적 구조에 대한 임시방편적 부가물이며, 코페르니쿠스의 체계에서는 그러한 가정이 전혀 필요하지 않다. 그림 35b처럼, 행성의 궤도가 완전히 지구 궤도 안쪽에 놓여 있을 경우 그 행성은 절대로 태양에서 멀리 떨어져 보이지 않게 된다. 최대 이각은 다이어그램에서처럼 지구에서 행성을 잇는 직선이 그 행성의 궤도와 접할 때, 즉 각 SPE가 직각일 때 나타날 것이다. 따라서 그 이각 SEP는 내행성이 태양에서 떨어질 수 있는 최대각이 된다. 이 체계의 기본적인 기하학적 구조는 수성과 금성이 태양에 묶여 있는 방식을 완전하게 설명해 준다.

코페르니쿠스식 기하학적 구조는 내행성의 운동에 대한 한층 더 중요한 또 하나의 측면을 드러내 준다. 그것은 바로 궤도의 순서다. 프톨레마이오스 체계에서 행성들은 지구 중심의 궤도로 정렬되었기 때문에 행성과 지구 사이의 평균 거리는 그 행성이 황도를 도는 데 걸리는 시간과 함께 증가했다. 이 장치는 외행성과 달에 대해서는 잘 작동했지만, 수성과 금성과 태양은 모두 황도를 한 바퀴 도는 데 평균 1년이 걸리고, 따라서 그들 궤도의 순서는 언제나 논쟁의 원천이 되어 왔다. 코페르니쿠스 체계에서는 비슷한 논쟁의 여지가 전혀 없는데, 이 체계에서는 어떠한 두 행성도 똑같은 공전 주기를 가지지 않는다. 달은 더 이상 이 문제에 관여하지 않는데, 왜냐하면 달은 중심의 태양 대신 지구 주위를 돌기 때문이다. 외행성인 화성, 목성, 토성은 새로운 중심에 대해서도 그들의 옛 순서를 유지하는데, 왜냐하면 그들의 공전 주기는 그들이 황도를 한 바퀴 도는 데 필요한 평균 시간과 똑같기 때문이다. 지구의 궤도는 화성의 궤도 안쪽에 있는데, 왜냐하면 지구의 공전 주기인 1년은 화성의 주기인 687일보다 짧기 때문이다. 이제 이 체계에 수성과 금성만 배치하면 되는데, 그들의 순서는 비로소 유일하게 결정된다.

이는 아래와 같이 설명될 수 있다. 금성은 584일에 한 번씩 역행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역행 운동은 오직 금성이 지구를 지나칠 때만 관찰될 수 있기 때문에, 584일은 그들이 태양 주위의 궤도를 도는 동안 금성이 지구를 한 번 따라잡는 데 걸리는 시간이 될 것이다. 이제 584일 동안 지구는 궤도를  번 돈다. 금성은 이 시간 동안 지구를 한 번 따라잡기 때문에, 금성은 궤도를  번 돌 것이다. 그러나 584일에 궤도를 번 도는 행성은 궤도를 한 번 도는 데  일이 걸릴 것이다. 금성의 주기 225일은 지구의 주기보다 짧고, 따라서 금성의 궤도는 지구 궤도 안쪽에 있어야 한다. 그리고 여기에는 애매한 부분이 하나도 없다. 비슷한 계산으로 수성의 궤도는 금성 안쪽에 놓이고 태양에 가장 가까이 있게 된다. 수성은 116일에 한 번씩 역행을 하고, 즉 116일에 한 번씩 지구를 앞지르기 때문에, 수성은 궤도를 116일에 정확히  번 돌아야 한다. 따라서 수성은 궤도를  일에 딱 한 번 돌 것이다. 그 주기 88일은 모든 행성 중 가장 짧고, 따라서 수성은 태양에 가장 가까운 행성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프톨레마이오스주의 천문학자들이 지구 중심의 궤도를 정렬하는 데 사용했던 똑같은 장치를 가지고 태양 중심의 행성 궤도들을 정렬했다. 즉 우주의 중심에서 더 멀리 있는 행성은 중심을 한 바퀴 도는 데 더 오래 걸린다는 원리를 사용했다. 궤도의 크기가 공전 주기와 함께 증가한다는 가정은 프톨레마이오스 체계보다 코페르니쿠스 체계에서 더 완전하게 적용될 수 있지만, 두 체계 모두에서 그것은 애초에 자의적이다. 비트루비우스의 원반 위의 개미들처럼, 행성이 이런 방식으로 움직여야 한다는 것은 자연스러워 보이지만, 그들이 그래야 할 필연성은 어디에도 없다. 어쩌면 그 가정은 모조리 쓸데없는 것일지도 모르고, 그 거리를 직접 계산할 수 있는 태양과 달을 제외한 행성들은 다른 순서를 가질지도 모른다.

이러한 재정렬 가능성에 대한 대답은 코페르니쿠스 체계와 프톨레마이오스 체계 사이의 또 다른 매우 중요한 차이를 만들어 내며, 이는 우리가 그의 서문에서 보았듯이 코페르니쿠스 본인이 특히 강조한 것이다. 프톨레마이오스 체계에서 임의의 행성의 주원과 주전원은 다른 행성 궤도들의 크기나 (중심의 지구에서 바라볼 때 별들 사이에서 보이는) 행성의 위치에 영향을 주지 않으면서 자유로이 축소시키거나 확대시킬 수 있다. 궤도의 순서는 궤도의 크기와 궤도의 주기 사이의 관계를 가정하면 정해질 수도 있다. 또한 궤도의 상대 크기들은 한 행성과 지구 사이의 최소 거리가 지구와 그 안쪽 행성 사이의 최대 거리와 똑같다는 (3장에서 살펴본) 추가적인 가정의 도움을 받으면 계산될 수도 있다. 그러나 둘 다 자연스러운 가정으로 보이긴 하지만, 어느 것도 필연적인 것은 아니다. 프톨레마이오스 체계는 둘 다 사용하지 않고서도 행성들에 대해 똑같은 겉보기 위치를 예측할 수 있었다. 프톨레마이오스 체계에서 그 겉보기 위치들은 행성 궤도들의 순서나 크기에 의존하지 않는다.

 
그림 36. 코페르니쿠스 체계에서 궤도의 상대 크기 계산하기. (a) 내행성의 경우, (b) 외행성의 경우.

코페르니쿠스 체계에서는 비슷한 자유가 허용되지 않는다. 만약 모든 행성이 태양을 중심으로 대략 원형으로 돈다면, 궤도들의 순서와 상대 크기들은 모두 추가적인 가정 없이도 관찰에 의해 직접 결정될 수 있다. 궤도들의 순서나 상대 크기조차 조금이라도 변하면 전체 체계를 무너뜨릴 수 있다. 예를 들어, 그림 36a는 내행성 P가 태양과 최대 이각 상태에 도달했을 때 지구에서 바라본 모습을 보여 준다. 그 궤도를 원으로 가정하면, 이각 SEP가 최댓값에 도달할 때 각 SPE는 직각이 되어야 한다. 행성, 태양, 지구는 하나의 직각삼각형을 형성하며, 그 예각 SEP는 직접 측정될 수 있다. 그런데 직각삼각형의 한 예각을 알면 그 삼각형의 변의 길이비들이 결정된다. 따라서 지구의 궤도 반지름 SE 대 내행성의 궤도 반지름 SP의 비는 각 SEP의 측정값으로부터 계산될 수 있다. 즉 지구의 궤도와 두 내행성의 궤도 사이의 상대 크기가 관찰에 의해 발견될 수 있는 것이다.

똑같은 계산은 외행성에 대해서도 가능하다. 단, 그 계산 기법은 더 복잡하다. 가능한 한 가지 기법은 그림 36b에 그려져 있다. 어떤 알려진 순간에 태양, 지구, 행성 모두가 직선 SEP상에 놓여 있다고 가정해 보자. 이는 그 행성이 황도상에서 태양과 정반대 방향에 있을 때이며, 역행 운동을 하고 있는 중이다. 지구는 자기 궤도를 어떤 외행성보다도 빨리 돌기 때문에, 얼마 후에 지구 E'와 행성 P'가 태양과 직각삼각형 SE'P'를 형성하는 순간이 오기 마련이고, 각 SE'P'는 지구에서 바라보는 태양과 그 외행성 사이의 각이기 때문에, 그것은 직접 결정될 수 있고 그 지점에 도달하는 데 걸리는 시간도 측정될 수 있다. 이제 각 ESE'가 계산될 수 있는데, 360° 대 그 값의 비는 지구가 자기 궤도를 한 바퀴 도는 데 걸리는 365일 대 지구가 E에서 E'로 움직이는 데 걸리는 시간의 비와 같아야 하기 때문이다. 각 PSP'는 정확히 똑같은 방식으로 결정될 수 있는데, 그 행성이 자기 궤도를 한 바퀴 도는 데 걸리는 시간은 이미 알고 있고, 그 행성이 P에서 P'까지 가는 데 걸리는 시간은 지구가 E에서 E'까지 가는 데 걸리는 시간과 같기 때문이다. 그러면 우리는 또 다시 한 예각 P'SE'를 알고 있는 직각삼각형 SE'P'를 얻게 되고, 따라서 지구 궤도 반지름 SE' 대 행성 궤도 반지름 SP'의 비는 내행성 때와 똑같이 결정될 수 있다.

이와 같은 기법들을 통해 모든 행성들의 거리는 지구와 태양 사이의 거리를 기준으로 측정될 수 있으며, 스타드를 비롯해 지구의 궤도 반지름을 측정하는 데 사용했던 어떤 단위로도 측정될 수 있다. 이제 비로소, 코페르니쿠스가 서문에서 얘기했듯이, “모든 행성들과 천구들 … 의 순서와 크기가 서로 너무도 밀접하게 묶여 있어서, 그것의 어떤 부분도 다른 모든 부분과 우주 전체를 교란시키지 않고선 변경될 수 없다”. 행성 궤도들의 상대 크기가 태양 중심 천문학의 첫 번째 기하학적 전제의 직접적인 귀결이기 때문에, 새로운 천문학은 코페르니쿠스가 보기에 이전의 지구 중심 버전에서는 결여되어 있던 자연스러움과 정합성을 지닌다. 코페르니쿠스의 체계에서는 충만성과 같은 별도의 혹은 임시방편의 가정들을 더 적게 사용하고서도 하늘의 구조를 도출할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코페르니쿠스가 서론에 해당하는 제1권 10장에서 그토록 강조하며 보여 준 새로운 미적 조화로, 이제 우리는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있을 만큼 새로운 체계에 대해 일단 충분히 배웠기 때문에(코페르니쿠스의 일반 독자들은 그러지 못했다) 그 장으로 넘어갈 것이다.

10. 천체들의 순서에 대해

항성 천구가 눈에 보이는 것들 중 가장 높은 곳에 있다는 것을 의심하는 사람은 (내가 알기로는) 아무도 없다. 고대의 철학자들은 행성들의 순서를 그 회전 주기에 따라 정하고 싶어 했다. 그 근거로 그들은 같은 속도로 움직이는 물체는 멀리 있을수록 느리게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다는 (유클리드의 『광학』에서 증명된) 사실을 제시한다. 그들은 달이 지구에 가장 가까이 있으면서 가장 작은 원을 돌기 때문에 가장 짧은 시간에 궤도를 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가장 긴 시간 동안 가장 큰 원을 도는 토성을 가장 높은 곳에 둔다. 그리고 그 아래에는 목성을, 또 그 아래에는 화성을 둔다.

금성과 수성에 관해서는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데, 이 행성들은 다른 행성들과 달리 태양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지 않는다. 어떤 사람들은 플라톤이 『티마이오스』에서 얘기한 것처럼 금성과 수성을 태양 위에 두었지만, 다른 사람들은 프톨레마이오스와 현대의 많은 이들처럼 그것들을 태양 아래에 두었다. 알페트라지우스[Alpetragius/ Al-Bitruji(12세기 이슬람 천문학자)]는 금성은 태양 위에, 수성은 태양 아래에 두었다. 플라톤의 추종자들에 따르면, 모든 행성은 원래는 어두운 물체이지만 햇빛을 받아 빛나게 된다. 이것이 맞을 경우, 만약 어떤 행성들이 태양 아래 있다면, 그 행성들은 태양과의 각이 크게 벌어지지 않기 때문에 반원이나 일정 정도 이지러진 원형으로 보여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초승달이나 그믐달 때처럼 그들이 위에서 받는 빛의 대부분은 태양 쪽으로 반사될 것이기 때문이다. [다음 장의 금성의 위상에 대한 논의를 보라. 이 효과도, 다음 효과도 망원경 없이는 잘 보이지 않는다.] 게다가, 태양은 이따금씩 이 행성들에 의해 가려져 그 크기만큼이라도 햇빛이 차단되는 일이 발생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일은 한 번도 관찰된 적이 없기 때문에, 플라톤의 추종자들은 그 행성들이 결코 우리와 태양 사이에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 [이후로 코페르니쿠스는 태양과 내행성들의 상대적인 순서를 정하는 데 흔히 사용된 논증들의 많은 난점들을 계속 지적한다. 그다음 이렇게 이어 나간다.]

태양이 자신으로부터 완전히 멀어질 수 있는 행성들과 그렇지 않은 행성들 사이에서[즉, 모든 이각을 가질 수 있는 외행성과 최대 이각이 제한된 내행성 사이에서] 돌고 있다는 프톨레마이오스의 증명 역시 설득력이 없다. 그것의 오류는 달도 태양으로부터 멀어질 수 있다는 사실에 의해 명백하게 드러난다. 또한 태양 아래 금성을 두고 그 아래 수성을 두는 사람들이든 모종의 다른 순서로 두는 사람들이든, 수성과 금성이 [자신의 주원이 태양의 주원과 묶여 있지 않은] 다른 행성들처럼 태양의 궤도와 독립된 궤도를 돌지 않는 것에 대해 무슨 이유를 내세울 수 있겠는가? 그들은 행성들의 상대 속도에 따라 그 순서가 결정된다는 원리를 위반하지 않고서는 그에 답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대안은 두 가지뿐이다. 우리는 지구가 행성들의 정렬 기준이 되는 중심이 아니란 것을 인정하거나, 아니면 그 행성들의 정렬 순서도 전혀 알지 못할 뿐 아니라 왜 가장 높은 곳에 목성이나 다른 어떤 행성이 아닌 토성이 배치되어야 하는지도 분명하지 않다는 것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 마르티아누스 카펠라[Martianus Capella, 헤라클레이데스에 의해 아마도 처음 제안된 내행성 이론을 기록한 5세기의 로마 백과사전 집필자]와 몇몇 다른 라틴어 책의 저자들의 기발한 견해를 진지하게 고려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들에 따르면, 금성과 수성은 다른 행성들과 달리 지구를 돌지 않고 태양을 중심으로 회전하기 때문에, 이 행성들은 자신들의 천구 반지름이 허용하는 범위 이상으로 태양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게 된다. … 이 말은 이 천구들의 중심이 태양에 가깝다는 뜻이 아니면 무엇이 될 수 있겠는가? 따라서 수성 천구는 분명 금성 천구 안에 들어 있어야 할 텐데, 모두가 동의하는 바에 따르면, 금성 천구는 수성 천구의 2배 이상으로 크다.

이제 우리는 이 가설을 토성, 목성, 화성에까지도 확장해서, 그들의 천구가 금성, 수성, 지구의 천구를 모두 포함할 만큼 크다는 전제 아래 그들도 같은 중심을 돈다고 생각해 볼 수 있다. … 이 외행성들은 저녁에 뜰 때, 다시 말해 행성이 태양의 반대편에 있고 지구가 태양과 행성 사이에 있을 때마다 지구에 가까워진다. 반대로 행성이 저녁에 질 때, 즉 행성이 태양에 가려 보이지 않고 태양이 행성과 지구 사이에 있을 때는 지구에서 멀어진다. 이러한 사실들로부터 그들의 중심은 지구가 아닌 태양에 있으며 그들이 금성과 수성의 회전 중심과 똑같은 중심을 돈다는 것이 충분히 증명된다.

[코페르니쿠스의 얘기는 사실 ‘증명’이 아니다. 프톨레마이오스 체계도 이 현상들을 코페르니쿠스 체계만큼 완전하게 설명해 주지만, 또다시 코페르니쿠스의 설명이 더 자연스러울 뿐이다. 왜냐하면 내행성들의 최대 이각에 대한 코페르니쿠스의 설명처럼, 그 설명은 태양 중심의 천문학 체계의 기하학적 구조에만 의존할 뿐, 그 행성들의 특정한 공전 주기에는 의존하지 않기 때문이다. 코페르니쿠스의 얘기는 그림 32a를 보면 분명해질 것이다. 외행성은 지구가 그 행성을 따라잡을 때 역행하고, 이 조건에서 그 행성은 동시에 지구에 가장 가까워져야 하고 태양과 황도 반대편에 있어야 한다. 프톨레마이오스 체계에서 역행 중인 외행성은 반드시 지구와 가장 가까워져야 하고, 태양과 하늘 반대편에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 행성이 태양과 하늘 반대편에 있는 것은 단지 그 주전원이 행성을 중심에 있는 지구에 가까이 데려다줄 때마다 행성이 태양 맞은편에 있게 되는 특별한 회전 속도로 그 행성의 주원과 주전원을 돌게 했기 때문일 뿐이다. 프톨레마이오스 체계에서는 주전원이나 주원의 주기가 소량만 달라져도 역행 중인 외행성이 태양과 하늘 반대편에 놓이는 정성적인 규칙성은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코페르니쿠스 체계에서는 이 현상이 행성의 공전 속도와 무관하게 일어나게 된다.]

그런데 이 천구들은 모두 하나의 중심을 가지므로, 금성 천구의 바깥 면과 화성 천구의 안쪽 면 사이의 공간 역시 두 천구와 같은 중심을 가진 천구로 간주해야 하며, 이 천구는 지구와 그 위성인 달, 그리고 달 천구에 포함된 모든 것을 수용할 수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의심할 바 없이 지구에서 가장 가까운 달을 지구에서 떼어 낼 수 없는 데다, 그 공간은 달이 들어갈 정도로 충분히 넓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지구의 중심이 달의 궤도와 함께 태양을 중심으로 1년에 한 바퀴씩 다른 행성들 사이에 있는 커다란 원을 돈다고 생각한다. 또한 우주의 중심은 태양 근처에 있고, 태양은 정지해 있기에 태양의 모든 겉보기 운동은 지구의 운동으로 더 잘 설명할 수 있다. 태양과 지구 사이의 거리는 다른 행성 천구들의 크기에 비해 무시할 만한 크기가 아니지만, 우주의 크기가 너무나 광대하기 때문에, 항성 천구의 크기에 비해서는 무시할 만하다.

지구를 우주의 중심에 놓게 되면 수많은 천구가 필요해져 문제를 혼란스럽게 만들 수밖에 없는데, 그보다는 이것을 믿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쓸모없거나 불필요한 것들을 하나도 만들어 내지 않으면서 여러 작용에 하나의 원인을 부여하길 좋아하는 자연의 지혜를 따르는 것이 낫다. 물론 이러한 견해는 어렵고, 상상하기도 어려우며, 많은 사람들의 믿음과 분명 상충한다. 그러나 다음의 논의를 통해, 별 문제가 없는 한 적어도 수학자들은 이를 아주 명쾌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천구의 크기가 그 주기에 따라 결정된다는 위의 견해가 유지된다면(그보다 나은 원리가 없으므로), 천구들의 순서는 가장 높이 있는 것부터 시작해서 다음과 같을 것이다. 가장 높이 있는 것은 항성 천구로, 이 천구는 모든 것을 포함하며 따라서 움직이지 않는다. 사실 이 천구는 다른 모든 천체의 운동과 위치의 기준이 되는 천구다. … 그다음은 행성인 토성으로, 30년에 한 바퀴를 회전한다. 다음으로는 목성이 12년에 한 바퀴를 돌고, 그다음에는 화성이 2년에 한 바퀴를 돈다. 넷째 자리[의 천구]는 1년에 한 바퀴를 도는데, 이곳에는 지구와 그 주전원인 달 천구가 들어 있다. 다섯째 자리에는 9달마다 한 바퀴를 도는 금성이 있고, 마지막 여섯째 자리에는 80일 주기로 회전하는 수성이 있다.

모든 것의 한가운데에 태양이 왕좌 위에 앉아 있다. 이 가장 아름다운 사원에서 이 빛나는 옥체가 전체를 한꺼번에 밝힐 수 있는 곳이 이곳 말고 어디에 있겠는가? 그는 우주의 등불, 우주의 정신, 우주의 통치자로 불리기도 하는데, 이는 상당히 적절한 이름이다. 헤르메스 트리스메기스투스는 그에게 ‘보이는 신’이라는 이름을 붙였고, 소포클레스의 엘렉트라는 그를 ‘모든 것을 보는 자’라고 불렀다. 따라서 태양은 그 주위를 돌고 있는 그의 자식들, 즉 행성들을 통치하는 왕좌에 ‘앉아 있다’. 지구는 언제나 달의 시중을 받는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동물[의 발생]에 관하여(On [the Generation] of Animals)』에서 말했듯이, 달은 지구와 가장 가까운 관계에 있다. 그러는 사이 지구는 태양과 관계를 맺으며, 해마다 새 생명을 잉태한다.

이로써 우리는 이러한 천체들의 배열 아래 놓여 있는 우주의 놀라운 대칭성과 다른 방식으로는 결코 발견할 수 없는 천구의 운동과 크기 사이의 조화로운 관계를 발견하게 된다. 왜냐하면 이 덕분에 우리는 왜 목성의 순행과 역행은 토성보다는 크고 화성보다는 작게 보이는지, 어째서 금성의 순행과 역행이 수성보다 크게 보이는지[그림 32를 보면 행성의 궤도가 지구에 가까울수록 그 행성의 겉보기 역행 운동이 더 커져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이는 코페르니쿠스 체계의 또 다른 조화다], 어째서 이런 방향 전환이 목성보다 토성에서 더 자주 일어나지만 수성에 비해 화성과 금성에서는 덜 자주 일어나는지[지구는 빠르게 도는 외행성보다 느리게 도는 외행성을 더 자주 따라잡을 것이고, 내행성의 경우엔 그 반대일 것이다], 또한 어째서 토성, 목성, 화성이 태양에 가려지거나 낮에 뜰 때보다 태양 반대편에 있을 때 지구에 더 가까운지, 또 특히나 화성이 밤새 빛날 때[즉 태양 반대편에 있을 때]는 그 크기가 목성과 비슷해서 목성과 화성을 단지 화성의 붉은색으로만 구분할 수 있지만, 다른 때에는 어째서 이등성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아 주의 깊게 그 운동 궤적을 쫓아야만 겨우 알아볼 수 있는지를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모든 현상은 동일한 원인에 의해 일어나는 것들로, 그 원인은 바로 지구의 운동이다.

이와 반대로 항성에는 이런 현상이 없다는 것은 그들이 한없이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을 증명하며, 바깥 천구의 [겉보기] 연주 운동 또는 그것의 흔적[연주 시차]이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바로 그 이유 때문이다. 왜냐하면 광학에서 증명된 바와 같이, 어떤 물체든 어떤 거리 이상 멀어지면 눈에 보이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별들의 반짝거림에 의해서도 우리는 행성 중 가장 높이 있는 토성과 항성 천구 사이에 매우 큰 간격이 있음을 알 수 있으며[왜냐하면 만약 별들이 토성과 아주 가까이에 있었다면, 그들도 토성만큼 빛났을 것이기 때문이다], 항성을 행성과 구별해주는 것은 주로 이러한 특징이다. 왜냐하면 움직이는 것과 움직이지 않는 것 사이에는 매우 커다란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가장 위대한 고귀한 창조자의 이 신성한 작품은 얼마나 광대한가!

결정적으로 중요한 이 10장 전체에 걸쳐 코페르니쿠스의 강조점은 “천구들의 운동과 크기에서 나타나는 조화의 놀라운 대칭성”과 “분명한 결합”에 있으며, 그것들은 바로 태양 중심의 기하학적 구조가 하늘의 모습에 부여한 것이다. 만약 태양이 중심에 있다면 내행성들은 도저히 태양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보일 수 없고, 외행성들은 지구에 가장 가까이 있을 때 태양과 반대쪽에 있어야 하며, 이러한 것들은 더 이어질 수 있다. 코페르니쿠스가 그의 새로운 접근의 타당성을 동시대인들에게 설득하기 위해 애쓸 때 동원한 것은 바로 이와 같은 논증이다. 각각의 논증은 프톨레마이오스의 체계 또는 코페르니쿠스에 의해 설명될 수 있는 모습의 측면을 언급한 다음, 코페르니쿠스의 설명이 얼마나 더 조화롭고, 정합적이고, 자연스러운지를 지적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그러한 논증은 엄청나게 많다. 조화로부터 끌어낸 증거의 총합은 대단히 인상적이다.

그러나 그것은 아무것도 아닐 수도 있다. ‘조화’는 지구의 운동을 논증하기에 이상한 토대로 보이는데, 왜냐하면 특히 그 조화가 완전한 코페르니쿠스 체계를 이루는 복잡한 많은 수의 원들로 가려져 있기 때문이다. 코페르니쿠스의 논증들은 실용적이지도 않다. 그 논증들은 기껏해야 실제 천문학자의 실용적 감각이 아닌 그의 미적 감각에만 호소력을 가질 뿐이다. 그 논증들은 일반인에게는 아무런 호소력을 가지지 못했는데, 그들은 그것들을 이해한다 하더라도 부수적인 천상의 조화를 중요한 지상의 부조화와 맞바꾸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논증들은 천문학자들에게도 반드시 호소력을 가진 것은 아니었는데, 왜냐하면 코페르니쿠스의 논증들이 지적한 조화들은 천문학자가 자신의 일을 더 잘 수행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새로운 조화들은 정확성도 단순성도 증가시키지 않았다. 따라서 그 논증들은 주로 수리 천문학자들 중에서 적은 수의 아마도 비합리적 소그룹에게나 호소력을 가질 수 있었고 정말로 호소력이 있었다. 그들은 바로, 이전에 알고 있었던 것보다 그다지 좋아진 게 없는 수치 예측을 끌어낼 뿐인 수많은 페이지의 복잡한 수학에도 불구하고 수학적 조화를 감지하는 신플라톤주의적 감각이 방해받지 않을 수 있었던 일부의 천문학자들을 말한다. 다행히, 다음 장에서 보겠지만, 그러한 천문학자들은 소수지만 있었다. 그들의 연구 역시도 코페르니쿠스 혁명의 본질적인 구성 요소를 이루고 있다.

점진적인 혁명

코페르니쿠스는 지구의 운동에 기초한 천문학 체계를 처음으로 완전하게 발전시켰기 때문에, 종종 최초의 근대적 천문학자로 일컬어진다. 그러나 『회전에 관하여』의 본문이 보여 주듯이, 그를 최후의 프톨레마이오스 천문학자로 부르는 것도 똑같은 설득력을 가질 수 있다. 프톨레마이오스 천문학의 의미는 고정된 지구에 기초해 예측한 천문학을 훨씬 넘어서며, 코페르니쿠스가 프톨레마이오스 전통과 결별한 것은 지구의 위치와 운동에 관한 부분뿐이다. 그의 천문학이 장착된 우주론적 틀은 지상계와 천상계에 대한 그의 물리학을 비롯해 심지어 자신의 체계로부터 적절한 예측을 산출하기 위해 사용했던 수학적 장치들까지 모두 고대와 중세의 과학자들이 확립한 전통에 속해 있다.

역사가들은 종종 코페르니쿠스가 진정 최후의 고대 천문학자인지 최초의 근대 천문학자인지를 두고 격렬한 논쟁을 벌이기도 했지만, 이 논쟁은 원리상 이치에 맞지 않는다. 코페르니쿠스는 고대 천문학자도 근대 천문학자도 아닌 르네상스 천문학자로, 그의 연구 속에서 두 전통은 결합되어 있다. 그의 연구가 진정 고대적인지 근대적인지 묻는 것은 딱 한 군데만 빼고 대부분 직선인 도로 위에서 커브 구간이 그곳 앞부분의 도로에 속하는지 뒷부분에 속하는지를 묻는 것과 같다. 커브 구간에서는 양쪽의 도로가 모두 보이고, 그 연속성이 분명해 보인다. 그러나 커브 앞부분의 지점에서 보면 도로는 커브까지 직선으로 가다가 사라지는 것처럼 보이고, 그 커브는 직선 도로의 종점처럼 보인다. 그리고 커브 뒷부분의 지점에서 보면, 그 도로는 그 커브에서 시작해서 직선으로 이어진 것처럼 보인다. 커브는 양쪽 모두에 똑같이 포함되어 있거나, 아니면 양쪽 어디에도 포함되어 있지 않다. 그곳은 도로의 진행 방향의 전환점이 된다. 마치 『회전에 관하여』가 천문학적 사고의 발전에서 방향 전환을 이룬 것처럼 말이다.

지금까지 이 장에서 우리는 주로 『회전에 관하여』와 이전의 천문학적·우주론적 전통 사이의 관련성을 강조했다. 코페르니쿠스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는 코페르니쿠스적 혁신의 정도를 최소화했는데, 이는 잠재적으로 파괴적인 혁신이 어떻게 그것에 의해 종국에 파괴될 전통에 의해 만들어질 수 있었는지를 알아보는 데 관심을 두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곧 보겠지만, 이것은 『회전에 관하여』를 바라보는 유일하게 적법한 관점이 아니며, 이후 대부분의 코페르니쿠스주의자들이 취한 관점도 아니다. 코페르니쿠스의 16세기와 17세기 추종자들에게, 『회전에 관하여』의 일차적인 중요성은 그것의 단 하나의 새로운 개념인 ‘행성으로서의 지구’와 코페르니쿠스가 그 개념을 통해 끌어낸 새로운 천문학적 귀결인 ‘새로운 조화’에서 나왔다. 그들에게 코페르니쿠스주의는 지구의 삼중 운동을 의미했고, 처음에는 딱 그것만 의미했다. 코페르니쿠스가 자신의 혁신에 덧입힌 전통적인 관념들은 그의 추종자들이 볼 때 그의 연구에서 핵심적인 요소가 아니었는데, 이는 그 관념들이 전통적인 요소일 뿐 과학에 대한 그의 기여가 아니었다는 단순한 이유 때문이었다. 『회전에 관하여』를 둘러싸고 사람들 사이의 싸움이 벌어진 것은 그것의 전통적인 요소들 때문이 아니었다.

이 점은 『회전에 관하여』가 새로운 천문학적·우주론적 전통의 시작점인 동시에 옛 전통의 정점일 수 있었던 이유다. 코페르니쿠스에 의해 움직이는 지구 개념으로 전향한 사람들은 코페르니쿠스가 멈춘 지점에서부터 연구를 시작했다. 그들의 시작점은 지구의 운동이었으며, 그들이 코페르니쿠스로부터 꼭 가져와야 했던 것은 그게 전부였다. 그들이 헌신한 문제들은 코페르니쿠스를 사로잡았던 오래된 천문학의 문제들이 아니라 그들이 『회전에 관하여』에서 발견한 새로운 태양 중심 천문학의 문제들이었다. 코페르니쿠스는 그들에게 자기 자신이나 자신의 선배들이 직면한 적이 없었던 여러 문제들을 제공했다. 그 문제들을 추구하는 도중에 코페르니쿠스 혁명은 완성됐고, 『회전에 관하여』로부터 나온 새로운 천문학적 전통이 확립됐다. 코페르니쿠스가 히파르코스와 프톨레마이오스를 돌아보았듯이, 근대 천문학은 『회전에 관하여』를 돌아본다.

과학의 근본적인 개념들이 겪는 주요한 격변들은 점진적으로 일어난다. 한 개인의 연구는 그러한 개념적 혁명에서 아주 돋보이는 역할을 할 수도 있지만, 만약 그렇다면, 그 연구가 그러한 명성을 얻는 것은 『회전에 관하여』처럼 과학에 새로운 문제를 제공하는 작은 혁신을 통해 혁명을 착수시킨 연구이거나 아니면 뉴턴의 『프린키피아』처럼 많은 원천들로부터 나온 개념들을 통합해 혁명을 종식시킨 연구이기 때문이다. 한 개인이 만들어 낼 수 있는 혁신의 정도는 필연적으로 제한되어 있는데, 왜냐하면 각 개인은 그가 전통적인 교육을 통해 얻은 도구들을 연구에 사용해야 하고 자신의 생애 동안 그것들을 모두 바꿀 수는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장의 앞부분에서 우리가 이상한 것으로 지적한 『회전에 관하여』의 요소들 중 대다수는 사실 전혀 이상한 것이 아닌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그 혁명의 이름이 되어 버린 사람의 연구 속에서 혁명 전체를 발견하길 기대한 사람들에게만 이상하게 보일 뿐이며, 그러한 기대는 새로운 과학적 사고 체계가 만들어지는 방식에 대한 오해에 기인한다. 『회전에 관하여』의 한계는 혁명을 야기한 모든 연구의 본질적이면서 전형적인 특징으로 간주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회전에 관하여』에서 이상하게 보이는 대부분은 그 저자의 개성을 반영하며, 코페르니쿠스의 개성은 천문학의 발전에서 차지하는 그의 중대한 역할에 완전히 적합해 보인다. 그는 섬세한 전문가였다. 그는 당시 되살아난 헬레니즘 수리 천문학 전통에 속해 있었으며, 그 전통은 우주론을 희생하더라도 행성들에 관한 수학적 문제를 강조했다. 그의 헬레니즘 전통의 선배들에게 주전원의 물리적 부조화는 프톨레마이오스 체계의 중요한 약점이 아니었고, 그는 전통적인 우주 속에 움직이는 지구를 집어넣고는 그것의 부조화를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우주론적 세부 사항에 비슷한 무관심을 보였다. 그에게는 수리 천문학의 세부 사항이 먼저였고, 하늘의 수학적 조화에만 초점을 맞추게 한 눈가리개를 쓰고 있었다. 그의 전문성을 공유하지 않았던 누구에게도 우주에 대한 코페르니쿠스의 견해는 편협해 보였고 그의 가치관은 왜곡되어 보였다.

그러나 하늘에 대한 과도한 관심과 왜곡된 가치관은 천문학과 우주론의 혁명을 착수시킨 그 사람에게 꼭 필요했던 특징들일지 모른다. 코페르니쿠스의 시선을 하늘에만 제한시킨 눈가리개는 적절한 역할을 수행했던 것일 수도 있다. 그 눈가리개는 천문학적 예측의 작은 정도의 불일치에도 그를 너무나 심란하게 만들었기에, 그것을 해결하려고 노력하는 도중에 그는 우주론적 이단인 지구의 운동을 끌어안을 수 있었다. 그 눈가리개는 그가 기하학적 조화에 너무나 집착하도록 만들었기 때문에, 그는 지구의 운동을 떠오르게 해 준 문제들을 그것이 해결하는 데 실패했을 때조차 그것의 조화만을 위해 자신의 이단적 생각을 고집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눈가리개는 덜 편협한 시각을 가진 사람들로 하여금 그의 혁신을 터무니없는 것으로 거부하게 만들었던 그것의 천문학 외적 귀결들을 회피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무엇보다도, 천체 운동에 대한 코페르니쿠스의 전적인 헌신은 지구의 운동에 따른 수학적 귀결들을 탐구하고 그 귀결들을 하늘에 대한 기존 지식과 일일이 맞추는 그 엄청나게 상세한 작업을 가능케 했다. 그 상세한 전문적 연구는 그의 진정한 기여다. 코페르니쿠스 이전에도 이후에도 그보다 급진적인 우주론자들은 있었다. 즉 커다란 붓질로 무한한 다세계 우주를 스케치한 사람들은 있었다. 그러나 그들 중 어느 누구도 『회전에 관하여』의 다음 권들[제2∼6권]과 같은 연구는 만들어내지 못했으며, 움직이는 지구로부터 천문학자의 일이 이루어질 수 있을 뿐 아니라 더 조화롭게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보인 이 책들이야말로 새로운 천문학적 전통이 시작될 수 있는 견실한 토대를 제공했다. 코페르니쿠스의 우주론적인 제1권만 나왔다면, 코페르니쿠스 혁명은 다른 누군가의 이름으로 알려졌을지 모르며 아마도 그랬을 것이다.

  1. 5장의 모든 인용은 코페르니쿠스의 『회전에 관하여』(1543) 서문과 1권에서 가져온 것이다. 번역은 John F. Dobson and Selig Brodetsky의 것으로, 『Occasional Notes of the Royal Astronomical Society』, vol. 2, no. 10(London: Royal Astronomical Society, 1947)로 출판되었다. 번역을 재수록하면서 나는 단어 “궤도(orbit)”를 “천구(sphere)”나 “원(circle)”으로 일관되게 교체했다[코페르니쿠스가 사용한 라틴어 orbis에 내재한 어려움에 관해서는 Edward Rosen, 『Three Copernican Treatises』(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1939), pp. 13∼16을 보라]. 아마도 열두 군데 정도에서, 나는 다른 종류의 현대적 용어를 자제하거나 더욱 명료한 이해를 위해 비슷한 사소한 변화를 주었다. 그러한 변화를 줄 때 나는 권위 있는 손 판(Thorn edition, 1873)을 알렉상드르 쿠아레(Alexandre Koyré)가 번역한 『회전에 관하여』 1권의 매우 유용한 라틴어ᐨ프랑스어판(Paris: Félix Alcan, 1934)으로부터 여러 차례 도움을 받았다. 나는 번역의 상당 부분을 재수록할 수 있게 허락해 준 왕립 천문학회(Royal Astronomical Society)에 빚을 지고 있다. (옮긴이 주) 현재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의 가장 권위있는 영문 번역본은 에드워드 로젠(Edward Rosen)이 번역한 Nicolaus Copernicus, On the Revolutions (Baltimore: The Johns Hopkins University Press, 1992)으로, 이 책에 수록된 『회전에 관하여』의 인용문들을 한국어로 번역할 때에는 로젠의 영문 번역본을 상당 부분 참고했다. 다음의 웹사이트에서는 로젠이 번역한 『회전에 관하여』 영문판 제1권 전체를 접근할 수 있다. http://www.webexhibits.org/calendars/year-text-Copernicus.html
  2. (옮긴이 주) 서구 문화에서 ‘수벌’은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서 무리에서 무시당하는 존재를 뜻한다.
  3. (옮긴이 주) 기원전 1세기의 로마 시인 호라티우스는 『시론(Ars Poetica)』에서, 작가는 새 원고를 출판하기 전까지 9년 동안 묵혀 두어야 충분한 객관성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코페르니쿠스는 이를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4. (옮긴이 주) 원문에는 포솜브로네가 아닌 셈프로니아(Sempronia)의 주교로 되어 있으나, 이는 쿤이 사용한 『회전에 관하여』 영역본의 오역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 영문 번역자는 코페르니쿠스의 ‘Semproniensi’가 ‘포솜브로네’의 옛 라틴어 명칭인 ‘Foro Semproniensi’의 축약된 형태라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Edwards Rosen, Copernicus and His Successors (Bloomsbury Publishing, 2010), p. 195, n. 15. 한편 여기서 언급된 파울 주교는 보통 미델뷔르흐의 파울(1446-1534)로 불리는 인물로, 1494년에 포솜브로네의 주교가 되었다.

목차

토머스 쿤 지음, 정동욱 옮김, 『코페르니쿠스 혁명 : 행성 천문학과 서구 사상의 발전』 (지식을만드는지식, 2016). 원문 : Thomas S. Kuhn, The Copernican Revolution: Planetary Astronomy in the Development of Western Thought (Harvard University Press, 19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