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y Astrology Is a Pseudoscience

점성술이 사이비과학이라는 데에는 많은 이들이 동의하고 있지만, 그것이 사이비과학인지에 대해서는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태거드는 그동안의 시도들(Bok, Jerome and Kurtz/검증 및 반증 가능성)을 비판적으로 검토한 후, 자신의 기준을 제시한다. 그의 기준은 이론뿐 아니라 (수행) 공동체와 역사적 맥락까지 고려한다. 그의 구획 원리를 정식화하면 다음과 같다.

  • 과학적이고자 하는 이론이나 분야는 다음의 경우 오직 그 경우에만 사이비과학적이다:
    1. 오랜 기간에 걸쳐 대안 이론에 비해 덜 진보적이었으며[1], 미해결 문제들이 산적해 있음에도,
    2. 그 수행 공동체(community of practioners)는 그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이론의 개선에는 별 노력을 보이지도 않고, 다른 이론에 비추어 자신의 이론을 평가하려고도 하지도 않으면서, 입증과 반입증에 대해서는 선택적으로 고려하고 있을 경우.

요약

점성술 역사

Bok, Jerome and Kurtz의 점성술 비판

Bok, Jerome and Kurtz 등은 첫째, 점성술이 마술적 세계관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는 점, 둘째, 인간에 영향을 주기엔 태양이나 행성이 너무 멀다는 점, 즉 점성술에는 물리학적 토대가 없다는 점, 셋째, 점성술에 믿는 사람들은 위안을 얻기 위함이라는 점을 들어 점성술을 비판했다.

그러나 첫째, 기원은 과학적 지위와 무관하고, 둘째, 대중적 믿음의 심리적 이유 또한 점성술의 과학적 지위와 무관하며, 셋째, 물리적 기초의 결여는 이론을 비과학적인 것으로 만들지 못한다. 따라서 위와 같은 이유는 (점성술을 비판하는 모종의 얘기는 될 수 있어도) 점성술을 사이비과학으로 몰아내진 못한다.

검증(입증)가능성

거칠게 말해, 관찰이 이론을 입증하거나 반입증하는 데 사용될 수 있으면, 그 이론은 검증(입증)가능하다. 그리고 한 이론이 검증가능하면 과학적이라고 하자는 아이디어이다. 그러나 이미 에이어(A. J. Ayer)는 그 원리가 대부분의 과학을 비과학적인 것으로 몰아내거나 반대로 아무것도 몰아내지 못하는 식으로 실패함을 보인 바 있다.

게다가 점성술은 모호하게 검증가능하다. 아주 정밀하진 않더라도 점성술은 어떤 예측을 하며 우리는 관찰 결과를 가지고 이론을 평가할 수 있다. Gauquelin의 통계적 조사에 따르면, 점성술의 예측과 실제 관찰 사이의 상관관계는 대부분 부정적인(무관한) 것으로 드러났다. 부정적인 것으로 드러났지만 어쨌든 점성술은 원리적으로 검증하다는 점은 유효하며, 검증가능성을 이유로 점성술을 사이비과학으로 몰아낼 수는 없다.

반증가능성

점성술 예측의 모호성은 점성술의 반증을 불가능하게 하는 것으로 보인다. 포퍼에 따르면, 점성술은 반증불가능하므로 비과학적이다.

그러나 뒤앙, 콰인, 라카토슈, 그리고 포퍼 본인까지도 반증의 심각한 난처함을 지적한 바 있다. 한 이론은 보조가설의 도입이나 수정을 통해 언제나 구제될 수 있으며, 관찰 진술이라고 명백한 것도 아니다. 라카토슈에 따르면 이론전체를 변경할 것이냐, 보조가설을 교체할 것이냐는 자의적이며, 반증 때마다 이론 전체를 거부하는 것은 쓸만한 이론의 싹을 잘라버리는 일이 될 수도 있다.

반증은 더 나은 이론이 있을 때에만 일어난다. 그렇다면 반증가능성은 이론 교체의 문제일 뿐이며, 점성술은 원리적으로 다른 이론으로 교체가능하므로, 반증가능성은 점성술을 사이비과학적인 것으로 거부할 아무런 기준도 제공하지 못한다.

Gauquelin의 검토에 따르면, 점성술 예측은 통계적 규칙성이 거의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 그렇다면 점성술은 반증된 것 아닌가? 그러나 이는 점성술을 (완전히) 반증하지 못하며, 점성술에게는 아직 여러 길이 열려 있다. 대부분의 과학 이론 또한 대안 이론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반증에 저항한다. 따라서 반증가능성 및 반증은 점성술을 사이비과학으로 몰아내지 못한다.

물론 점성술에는 아직 풀리지 않은 문제가 산적해 있다. 그러나 풀리지 않은 문제가 산적해 있다고 해서 점성술이 거짓이라거나 사이비과학적인 것으로 간주될 수는 없다. 대부분의 과학 이론들도 풀리지 않은 문제로 산적해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태거드의 구획 기준

태거드의 구획 기준의 고려사항은 이론, (연구)공동체, 역사적 맥락, 이 세 가지의 행렬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의 구획 원리를 정식화하면 다음과 같다.

  • 과학적이고자 하는 이론이나 분야는 다음의 경우 오직 그 경우에만 사이비과학적이다:
    1. 오랜 기간에 걸쳐 대안 이론에 비해 덜 진보적이었으며[2], 미해결 문제들이 산적해 있음에도,
    2. 그 수행 공동체(community of practioners)는 그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이론의 개선에는 별 노력을 보이지도 않고, 다른 이론에 비추어 자신의 이론을 평가하려고도 하지도 않으면서, 입증과 반입증에 대해서는 선택적으로 고려하고 있을 경우.

이 원리는 점성술에서 무엇이 가장 비과학적인지를 포착하고 있다. 첫째, 점성술은 극적으로 비진보적이다. 즉 점성술은 프톨레마이오스 시대 이래 변화된 것도 설명력에 추가된 것도 거의 없다. 둘째, (주야평)분점의 섭동[3]과 같은 문제가 아직까지 눈에 띄게 남아 있다. 셋째, 개성과 행동에 관한 대안적인 이론이 존재한다. 넷째, 점성술 (수행) 공동체는 일반적으로 현저한 문제를 풀어 점성술을 개선하거나 다른 이론과 비교하여 자신의 이론을 평가하는 데 관심이 없다. 이러한 이유들에 의해, 태거드의 기준은 점성술을 사이비과학적인 것으로 간주한다.

태거드의 구획 기준은 라카토슈와 쿤과 공통점이 있는 동시에 차이점이 있다. 첫째, 라카토슈가 진보성을 중요하게 여긴 것에는 동감하지만, 그것만으로는 과학과 비과학을 구분짓는 데 부족하다.[4] 둘째, 쿤이 패러다임 지배적인 퍼즐 풀이 활동의 부재를 이유로 점성술을 사이비과학으로 여긴 것에 대해서는 해석에 따라 반대할 수도 동의할 수도 있다. 왓킨스(Watkins)에 따르면, 개인점을 치는 수준에서는 점성술사들도 그들 이론이나 패러다임의 기초에는 무심한 채 분명 퍼즐 풀이를 하고 있다. 점성술을 사이비과학으로 만드는 것은 쿤식의 정상과학기가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 지지자들이 더 진보적인 대안 이론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정상" 과학자들의 무비판적 태도를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야평분점의 섭동과 같은 이론적 문제의 수준에서 볼 때, 점성술사는 패러다임이 가져다 주는 이론적 문제 풀이에 대한 자신감을 가지고 있지 않다.[5] 즉 이점에서 쿤은 태거드와 합의점을 가진다.

태거드의 기준은 점성술 외의 사이비과학에도 적용가능하다. 이를 적용했을 때 마술이나 pyramidology 등의 활동은 사이비과학적인 것으로 간주되는 반면, 현대의 물리학, 화학, 생물학 등은 위협받지 않는다. 하지만 바이오리듬은 사이비과학으로 간주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를 대체할 대안 이론이 없기 때문이다.[6]

태거드의 구획 기준의 귀결, 함의, 중요성

태거드의 기준은 한 가지 흥미로운 귀결을 가진다. 이론은 한 시점에서 과학적이다가 다른 시점에서는 사이비과학적일 수 있다. 현재 점성술은 사이비과학이지만, 고대 또는 르네상스 시기에는 과학적인 활동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과학/사이비과학은 초역사적 범주가 아니다. 합리성은 생각이 가진 항구적인 속성이 아니다. 행동처럼, 생각은 한 시점에서 합리적이었다가 다른 시점에서는 비합리적일 수 있다. 역사적 시기에 따른 과학/비과학 구분의 상대화는 바람직한 귀결이다.

그런데, 수수께끼처럼 보이는 역사적 문제가 남아있다. 태거드의 기준에 따르면, 점성술은 현대적인 심리학이 나타난 19세기에서야 사이비과학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18세기 초부터 점성술은 과학자 공동체에서 배제되기 시작했다. 이는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간단한 답은, 한 이론은 그것이 사이비과학의 딱지를 부여받기 전에 이미 전망없는 기획의 징후를 띨 수 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천문학 혁명과 뉴턴, 데카르트, 홉스의 메커니즘은 점성술의 그럴듯함을 깍아내렸으며(새로이 부상한 이론과의 양립불가능성 또는 설명방식 및 전제에서의 차이), 17세기 과학의 엄청난 성장과 대비되어 점성술의 지체는 두드러져 보이게 되었다(대비 효과). 이러한 상황은 점성술의 전망을 어둡게 한 좋은 이유를 제공하긴 하지만, 그것이 점성술을 사이비과학으로 간주하거나 점성술을 반박할 충분한 이유가 되지는 못한다.

태거드의 기준은 그 사회적 성격 때문에 일종의 문화적 상대주의를 제안하는 것일 수도 있다. 첫째, 한 고립된 그룹에서 대안 이론을 알지 못한 채 점성술을 수행하는 경우, 그들에게 점성술은 과학적인가? 둘째, 반대로 외계생명체에 의한 대안 이론이나 미래에 있을 대안 이론을 상정할 경우, 현재의 이론은 모두 사이비과학적인가? 첫 번째 이야기는 "대안"을 너무 좁게 봤고, 두 번째 이야기는 "대안"을 너무 넓게 봤다. 태거드에게 대안이란 이 세계에서 일반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것을 말한다. 이는 첫째 한 공동체가 접근할 수 있는 어떤 종류의 커뮤니케이션 네트워크가 있다는 것을 가정하며, 둘째로 대안을 찾을 책임이 개인과 공동체에 있다는 것을 가정한다. 태거드는 이 두 번째 가정이 합리성의 일반적 특성임을 주장한다. 이는 사이비과학적이라는 판정을 피하기 위한 현실 도피를 배제하는 데 충분한 기준이다.

태거드는 논리실증주의자들처럼 반형이상학을 하려는 것도 아니고, 포퍼처럼 반프로이트, 반맑스주의를 하려는 것도 아니다. 태거드의 관심은 사회에 있다. 현대 사회는 두 가지 쌍둥이 문제에 직면해 있다. 첫째, 과학의 진보에 대한 공적인 관심 결여, 둘째, 과학과 기술에 의해 제기된 중대한 윤리적 문제에 대한 공적인 관심 결여. 이 두 가지 관심 결여의 한 이유에는 대중들 사이에 널리 퍼진 사이비과학과 신비주의(occult)가 있다. 과학과 사이비과학의 차이를 해명하는 문제는 진짜 과학에 대한 대중적 무시를 극복하기 위한 철학적 작업이다.

각주

  1. 여기서 진보적이라 함은 그 이론이 설명 사실과 해결된 문제를 추가하는 데 성공하느냐의 문제임
  2. 여기서 진보적이라 함은 그 이론이 설명 사실과 해결된 문제를 추가하는 데 성공하느냐의 문제임
  3. 분점의 섭동은 물병자리에 해당하는 시점이 언제부터인지를 결정하는 데 매우 큰 문제를 야기한다.
  4. 라카토슈의 진보성 개념과 태거드의 진보성 개념이 같은 것인지는 좀 헷갈린 면이 있다.
  5. 내가 보기에 쿤이 자신의 논문 "발견의 논리인가 탐구의 심리학인가"에서 의도한 것은 바로 이 점이었다. 보통의 과학은 패러다임에 의해 해결가능한 또는 해결가능하다고 여겨지는 문제, 즉 퍼즐 풀이 활동의 특징을 갖추고 있는 반면, 점성술은 해결가능한 문제를 가지고 있지 않다. 점성술에서의 이론적 문제들은 대부분 개인의 능력과 책임을 벗어난 막막한 문제이기에, 그 이론을 개선할 어떠한 지침도 주지 못한다.
  6. 이는 점성술이 18세기 과학에서 밀려나기 시작했지만, 그럼에도 사이비과학으로 완전히 간주될 수 없는 이유와 같은 것으로 보인다.

관련 항목

구획 문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