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과 사이비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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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레 라카토슈 저, 신중섭 옮김, “서론 : 과학과 사이비 과학”, 『과학적 연구 프로그램의 방법론』 (아카넷, 2002), 5-16쪽. 원저: Imre Lakatos, The Methodology of Scientific Research Programmes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78). 이 글은 원래 1973년 초에 작성되어, 1973년 6월 30일 개방대학의 라디오 강의로 방송되었다. WikiNote로 옮기는 과정에서 일부 오역은 zolaist에 의해 수정되었다.

본문

과학과 사이비과학


임레 라카토슈(Imre Lakatos)

신중섭 옮김, 정동욱 수정


지식에 대한 존경심은 인간의 가장 두드러진 특성 가운데 하나이다. 라틴어로 지식은 ‘scientia’이며 과학은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지식을 나타내는 말이 되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미신, 이데올로기, 사이비 과학에서 과학을 구별해낼 수 있는가? 가톨릭 교회는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이 사이비 과학이라는 이유로 그를 지지한 과학자들을 파문했다. 공산당은 멘델의 이론이 사이비 과학이라는 이유로 이 이론을 따르는 생물학자들을 박해했다. 과학과 사이비 과학을 구별짓는 것은 강단철학에 국한된 문제만은 아니다. 이 문제는 정치, 사회적인 문제와 긴밀히 연관되어 있다.

여러 철학자들은 ‘많은 사람들이 어떤 진술을 매우 강하게 믿는다면, 그 진술은 지식을 구성한다’라고 말함으로써 구획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 그러나 사상의 역사를 살펴보면 많은 사람들이 완전히 터무니없는 믿음을 신봉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만일 신념의 강도가 지식의 징표라면, 정령, 천사, 악마, 천당과 지옥에 관한 이야기들도 지식의 울타리 안에 포함시켜야만 한다. 이와 대조적으로 과학자들은 최상의 과학 이론에 대해서 몹시 회의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뉴턴의 이론은 과학이 지금까지 제시한 이론 가운데 가장 강력한 이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뉴턴 자신은 서로 떨어져 있는 두 물체 사이에 인력이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결코 믿으려 하지 않았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신념의 강도가 그 신념을 지식으로 만들지는 못한다. 실제로 가장 소중히 여기는 자신의 이론에 대해 회의적 태도를 취하는 것이 과학적 태도일 수도 있다. 맹목적인 믿음으로 이론을 받드는 태도는 지적인 미덕이 아니라 죄악이다.

따라서 한 진술이 아주 그럴듯하고 모든 사람들이 그것을 믿는다고 해도 사이비 과학적인 진술일 수 있으며, 전혀 믿을 만하게 보이지 않고, 어느 누구도 그것을 믿지 않는다고 해도 과학적으로 중요한 가치를 지닐 수 있다. 한 이론은 그것을 이해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고, 아무도 그것을 믿지 않는다고 해도 탁월한 과학적 가치를 지닐 수 있다.

한 이론의 인식적 가치는 그것이 사람들의 마음에 미치는 심리적인 영향력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신념이나 공동의 약속, 이해는 인간의 마음 상태이다. 그러나 한 이론의 객관적, 과학적 가치는 그 이론을 만들어내거나 이해하는 인간의 마음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이론의 과학적 가치는 그 추측이 실제로 받고 있는 객관적 뒷받침에 달려 있다. 이와 관련하여 흄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손에 신학이나 강단형이상학에 대한 책을 들고 있다면 스스로 다음과 같이 물어 보라. 그 책이 양이나 수에 대한 추상적인 추론을 포함하고 있는가? 만일 포함하고 있지 않다면 또 다음과 같이 물어 보라. 그 책이 사실과 존재하는 것에 관한 경험적인 실험적 추론을 포함하고 있는가? 만일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그 책을 아궁이 속에 처넣어 버려라. 왜냐하면 그 책은 궤변과 헛소리밖에 담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실험적 추론이란 무엇인가? 주술에 대한 17세기의 방대한 문헌을 살펴보면, 주의 깊은 관찰 보고와 확고한 증거, 심지어는 실험에 대한 보고가 빽빽이 적혀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초기 왕립학회에 소속된 철학자였던 글랜빌(Glanvill)은 주술을 실험적 추론의 패러다임[모범 사례]으로 간주하였다. 우리는 우선 흄이 말한 책들을 아궁이 속에 처넣기 전에 먼저 실험적 추론에 대한 정의부터 내려야 한다.

과학적 추론에서, 이론은 사실과 맞닥뜨린다. 그리고 과학적 추론의 핵심적인 조건 가운데 하나는 이론이 사실들에 의해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정확하게 사실이 이론을 지지할 수 있는가?

여기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다른 대답들이 제시되었다. 뉴턴 스스로는 사실에 의거해 자신의 법칙을 증명했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자신이 단지 가설만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몹시 자랑스럽게 생각하였다. 그는 사실에 의해 증명된 이론들만을 출판하였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특히 그는 케플러가 제시한 현상에서 그의 법칙이 연역되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자랑은 말이 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케플러에 따르면 행성은 타원 궤도로 운동하지만 뉴턴에 의하면 행성들이 운동을 하면서 서로를 교란시키지 않을 때만 타원 궤도로 운동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행성들은 분명 서로를 교란시킨다. 이러한 이유로 뉴턴은 섭동 이론을 고안해 내야 했고, 이 섭동 이론에 따르면 타원 궤도로 운동하는 행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제한된 사실에서 자연 법칙을 타당하게 연역할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은 오늘날에는 누구에게나 아주 쉬운 일이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들은 과학 이론이 사실에 의해 증명된다고 생각한다. 왜 사람들은 이러한 단순한 사실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것에 집착하는가?

아주 그럴듯하게 설명하자면 이렇다. 과학자들은 그들의 이론이 신뢰할 만한 것이 되길 원한다. 곧 그들은 자신들의 이론이 참된 지식, 즉 과학이라는 명칭을 부여받기를 바란다. 과학이 탄생한 17세기에는 가장 적절한 지식이 신과 악마, 천당과 지옥에 관련된 것이었다. 만일 신학적인 문제에 대한 추측이 잘못되었다면 그것은 곧 영원한 천벌을 의미했다. 신학적인 지식은 오류가 있을 수 없다. 그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어야만 한다. 그런데 계몽주의자들은 우리가 오류를 범할 수 있고 신학적인 문제에 대해 무지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과학적 신학은 존재하지 않으며, 따라서 신학적인 지식도 존재할 수 없다. 지식은 오직 자연에 대한 지식뿐이다. 그런데 이러한 새로운 형태의 지식은 신학에서 직접 넘겨 받은 기준, 곧 의심의 여지없이 증명되어야 한다는 기준에 의해 판단되어야만 했다. 과학은 신학으로부터 도망쳐 나온 확실성을 획득해야만 했다. 과학자라는 명칭에 부합하려면 그는 절대로 추측을 해서는 안 된다. 그는 자신이 말한 모든 진술을 사실에 의해 증명해야만 했다. 그것이 바로 과학적 정직성의 기준이었다. 사실에 의해 증명되지 못한 이론은 사악한 사이비 과학으로 간주되었으며, 과학자 공동체에서 이단으로 취급되었다.

20세기에 들어와서 뉴턴의 이론이 무너지고 난 뒤에야 비로소 과학자들은 자신들의 정직성의 기준이 유토피아적임을 깨닫게 되었다. 아인슈타인 이전의 대부분의 과학자들은 뉴턴이 신의 영원한 법칙을 사실에 의해 증명함으로써 해독해냈다고 생각했다. 19세기 초에 암페어는 전자기와 관련된 그의 사변을 담은 책의 제목을 『실험에서 부적절하게 연역된 전기역학 현상에 대한 수학 이론』으로 해야만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는 그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어떤 실험은 실제로 행해지지도 않았으며 필요한 실험 기구조차 만들지 못했다고 조심스럽게 고백하고 있다.

만일 모든 과학 이론이 똑같이 증명될 수 없다고 한다면 무엇으로 무지로부터 과학적 지식을 구별하고 사이비 과학으로부터 과학을 구별해낼 수 있겠는가?

20세기의 귀납논리학자들은 이 문제에 대한 답을 한 가지 제시하였다. 귀납논리학은 유효한 모든 증거에 의해 서로 다른 이론들의 확률을 정의하였다. 만일 한 이론의 수학적 확률이 높다면, 이것은 그 이론이 과학적임을 보증해 주는 것이 된다. 이에 반해 만일 어떤 이론의 확률이 낮거나 0이라면 그 이론은 과학적 이론이 아니다. 따라서 적어도 확률이 높지 않은 것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 것은 과학적 정직성의 징표이다. 확률을 내세운 입장은 과학과 사이비 과학을 흑백 논리로 구별하는 대신에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는데, 확률이 높은 좋은 이론과 확률이 낮은 빈약한 이론을 정도의 차이로 구분하였다. 그러나 가장 영향력 있는 현대 철학자 가운데 한 사람인 칼 포퍼는 1934년에 모든 이론의 수학적 확률은 그것이 과학적이든 사이비 과학적이든, 아무리 많은 증거가 주어지든 관계없이 0이라고 주장하였다. 만일 포퍼가 옳다면, 과학 이론은 과학 아닌 것과 마찬가지로 증명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개연성도 갖지 못한다. 새로운 구획 기준이 필요하게 되었으며 포퍼는 아주 훌륭한 구획 기준을 제시하였다. 어떤 이론은 뒷받침해 주는 증거가 전혀 없어도 과학적일 수 있으며, 어떤 이론은 그것을 뒷받침해 주는 유효한 증거가 아주 많음에도 불구하고 사이비 과학적일 수 있다. 바꾸어 말하면 이론이 과학적인가 아니면 비과학적인가 하는 것은 사실과 독립되어 결정될 수 있다. 이론은 그 이론을 반증할 수 있는 결정적 실험(또는 관찰)을 미리 명확히 제시할 수만 있으면 ‘과학적인’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잠재적 반증자’를 명확히 제시할 수 없으면 그 이론은 사이비 과학 이론인 것이다. 그런데 만일 그렇다면 우리는 사이비 과학 이론과 과학 이론을 구획하는 것이 아니라 비과학적인 방법과 과학적인 방법을 구획하는 것이다. 포퍼주의자에 의하면 마르크스주의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어떤 사실이 관찰된다면 스스로 마르크스주의를 포기할 수 있는지 명백히 제시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과학적 이론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만일 마르크스주의자들이 그렇게 하려고 하지 않는다면 마르크스주의는 사이비 과학이다. 마르크스주의자에게 어떤 사건이 일어나는 경우에 그가 자신의 마르크스주의를 기꺼이 포기할 것인지를 물어보는 것은 매우 홍미로운 일이다. 만일 그가 마르크스주의에 몸담고 있다면, 그것을 반증할 수 있는 사건을 명시적으로 제시하는 일은 부도덕한 일로 규정될 것이다. 따라서 어떤 명제가 사이비 과학적인 독단으로 머물 것인가 아니면 참된 지식이 될 것인가는 우리가 그 명제를 반박할 수 있는 관찰가능한 조건을 언급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그렇지 않은가에 달려 있다.

그런데 포퍼의 반증가능성의 기준이 과학과 사이비 과학을 구획하는 문제에 대한 해결책일 수 있었는가?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포퍼의 구획 기준은 과학 이론의 주목할 만한 끈기를 간과하고 있다. 과학자들의 얼굴은 두껍다. 과학자들은 자신이 주장하는 이론이 사실과 모순된다고 해서 그것을 쉽게 포기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과학자들은 자신들이 단순한 변칙이라고 부르는 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 어떤 보조 가설을 만들어 내려고 하거나, 변칙을 설명할 수 없는 경우 그것을 무시해 버리고 다른 문제로 관심을 돌려버린다. 과학자들이 변칙이나 다루기 힘든 사례에 대해서는 이야기해도 반박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주목하라. 물론 과학의 역사는 어떻게 결정적 실험이 이론을 죽였는지를 설명해 주는 사례들로 가득차 있다. 그러나 그러한 설명은 이론이 포기되고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 꾸며낸 이야기이다. 만일 포퍼가 뉴턴을 지지하는 과학자들에게 어떤 실험 조건에서 뉴턴의 이론을 버릴 것인가를 물어보았다고 한다면, 그들은 마르크스주의자가 빠진 곤경과 동일한 곤경에 빠졌을 것이다. 그렇다면 과학임을 보증해 주는 특징은 무엇인가? 과학혁명은 공동의 약속에 대한 비합리적인 변화이며, 일종의 종교적 개종이라는 주장을 받아들이고 동의해야만 하는가? 미국의 저명한 과학철학자인 토마스 쿤은 포퍼의 반증주의가 안고 있는 소박함을 발견한 후에 이러한 결론에 도달하였다. 그러나 쿤이 옳다면 과학과 사이비 과학 사이에는 명확한 구별도, 과학적 진보와 지적 쇠퇴, 정직성의 객관적 기준도 있을 수 없다. 어떠한 기준이 과학적 진보와 지적인 퇴행 사이의 구획을 제시해 줄 수 있겠는가?

최근 몇 년 동안 나는 포퍼와 쿤이 해결하지 못한 몇몇 문제들을 해결한 과학적 연구 프로그램의 방법론을 옹호하였다.

첫째로 나는 위대한 과학적 업적의 전형적인 기술적(記述的) 단위는 서로 분리된 가설이 아니라 하나의 연구 프로그램이라고 주장하였다. 과학은 단순한 시행과 착오가 아니라 [일정 시간에 걸친] 추측과 반박의 연속물(series)이다. ‘모든 백조는 희다’라는 진술은 한 마리의 검은 백조가 발견되면 반증될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사소한 시행과 착오는 과학의 지위를 부여받을 수 없다. 예를 들면, 뉴턴의 과학은 단순한 4개의 추측, 즉 역학에 대한 3가지 법칙과 하나의 중력 법칙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4가지 법칙은 단순히 뉴턴 프로그램의 견고한 핵(hard core)을 구성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 견고한 핵은 거대한 보조 가설의 보호대(protective belt)에 의해 반증으로부터 철저한 보호를 받는다. 그리고 더욱더 중요한 것은 이 연구 프로그램이 발견법(heuristic)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말하자면 강력한 문제 해결의 장치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 강력한 문제 해결의 장치는 세련되고 엄밀한 기법으로 변칙 사례를 흡수하고 그것을 긍정적인 증거로 바꾼다. 예를 들어, 행성이 운동해야 하는 궤도를 따라 정확하게 운동하지 않는다면, 뉴턴의 이론을 따르는 과학자들은 대기차와 관련된 추측, 자기폭풍 내에서 빛의 전달과 관련된 추측, 이 프로그램을 구성하고 있는 그 밖의 다른 많은 추측들을 조사한다. 심지어 그들은 그 변칙 사례를 설명하기 위해서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행성을 꾸며내고 그것의 위치, 질량, 속도를 계산해낼 수도 있다.

그런데 뉴턴의 중력 이론,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 양자역학, 마르크스주의, 프로이트주의는 모두 연구 프로그램으로, 각각의 프로그램은 철저하게 방어되는 특징적인 견고한 핵과 그것보다는 좀더 유연한 보호대, 그리고 세련된 문제 해결의 장치를 가지고 있다. 이들 각각은 그것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해결될 수 없는 문제와 처리할 수 없는 변칙에 직면하게 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본다면 모든 이론은 반박될 소지와 반박받아 사라질 소지를 가지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이론들이 동등하다고 볼 수 있겠는가? 지금까지 나는 연구 프로그램의 특징이 무엇인가를 기술했다. 그런데 어떻게 사이비 과학적이고 퇴행적인 프로그램과 과학적이고 진보적인 프로그램을 구별할 수 있겠는가?

포퍼의 주장과는 달리 그 차이점이 어떤 이론은 여전히 반박되지 않고, 어떤 이론은 이미 반박되었다는 사실에서 찾아지는 것은 아니다. 뉴턴이 『프린키피아』를 출판하였을 당시에는 그의 이론이 달의 운동에 대해서는 적절하게 설명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이 일반적인 생각이었다. 실제로 달의 운동은 뉴턴의 이론을 반박하였다. 뛰어난 물리학자였던 카우프만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을 그 이론이 발표되던 해에 반박하였다. 그러나 내가 높이 평가하는 모든 연구 프로그램은 하나의 공통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들 프로그램은 모두 새로운 사실을 예측했으며, 선행 프로그램이 꿈도 꾸지 못한 사실이나 그 프로그램과 모순된 사실을 예측하였다. 예를 들면 뉴턴이 그의 중력 이론을 출판한 1686년에는 혜성에 관한 두 가지 이론이 있었다. 나머지 하나와 비교해서 더 일반적으로 통용되었던 이론은 혜성을 진노한 신이 재앙을 내릴 것임을 예고하는 경고의 표시로 간주하였다.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케플러의 이론은 혜성을 직선 운동을 하는 천체라고 주장하였다. 그런데 뉴턴의 이론에 따르면 혜성들 가운데 몇몇은 되돌아오지 않는 쌍곡선이나 포물선으로 운동하고 그 밖의 나머지 혜성들은 통상적인 타원 궤도로 운동한다. 뉴턴의 프로그램 안에서 연구를 하고 있던 핼리는 관찰 결과에 근거하여 한 혜성의 대략적인 경로를 계산했는데, 이에 따르면 그 혜성은 72년 후에 되돌아와야 했다. 그리고 그는 하늘의 특정 지점에 그것이 언제 나타날 것이라는 정확한 시간도 계산하였다.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뉴턴과 핼리가 죽고나서 오랜 시간이 지난 72년 후, 핼리의 혜성은 핼리의 예측대로 정확히 되돌아왔다. 이와 유사하게 뉴턴의 이론을 따르는 과학자들은 그때까지 관찰되지 않았던 작은 행성의 존재와 그것의 정확한 운동을 예측하였다. 아인슈타인 프로그램과 관련된 다른 예를 들어보기로 하자. 아인슈타인의 프로그램은 만일 밤에 두 별 사이의 거리를 측정하고 낮에 그 두 별(일시적으로 그 별을 볼 수 있을 때) 사이의 거리를 측정한다면, 측정값이 다르게 될 것이라는 놀라운 예측을 하였다. 아인슈타인 프로그램 이전에 그러한 관찰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리하여 진보적인 프로그램에서 이론은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새로운 사실의 발견을 가능하게 해준다. 그러나 퇴행적인 프로그램에서 이론은 알려진 사실을 조정하기 위해서 짜맞추어진다. 구체적으로 이야기한다면, 마르크스주의가 놀라운 새로운 사실을 성공적으로 예측한 적이 있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마르크스주의는 성공적이지 못한 유명한 몇 가지 예측을 하였다. 마르크스주의는 노동자 계급이 절대적으로 빈곤해질 것이라고 예측하였다. 그리고 가장 산업화된 사회에서 최초로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날 것이라는 예측도 하였다. 마르크스주의는 사회주의 사회에서는 혁명이 없을 것이라고 예측하였다. 마르크스주의는 사회주의 국가들 사이에는 이해의 갈등이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는 예측도 하였다. 이러한 맥락에서 본다면 마르크스주의의 초기 예측은 대담하고 놀라운 것이었지만 실패하고 말았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이러한 모든 실패를 설명하였다. 그들은 제국주의 이론을 만들어냄으로써 노동자 계급의 생활 수준이 향상되었다는 사실을 설명하였다. 그들은 왜 최초의 사회주의 혁명이 산업적으로 후진국이었던 러시아에서 일어나게 되었는지도 설명하였다. 그들은 1953년의 베를린 사건, 1956년의 부다페스트 사건, 1968년의 프라하 사건을 설명하였다. 그들은 러시아와 중공 사이의 갈등도 설명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내세운 보조 가설은 사실들로부터 마르크스 이론을 보호하려는 의도에서 뒤에 만들어진 것이다. 뉴턴의 프로그램은 새로운 사실을 우리에게 가져다 주었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사실에 뒤처져 사실을 따라잡기 위해 급히 뛰어갔다.

지금까지의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경험적 진보의 징표는 사소한 검증이 아니다. 사소한 검증이 무수히 많이 존재한다고 생각한 포퍼의 입장은 타당하다. 돌이 떨어질 때 언제나 지구를 향해 떨어진다고 하는 것은, 그것이 아무리 반복된다고 할지라도 뉴턴 이론이 성공적임을 보장해 주지는 못한다. 그러나 포퍼의 주장과는 달리 흔히 말하는 반박이 경험적인 실패를 말해 주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모든 프로그램은 영속적인 변칙 가운데서 성장하기 때문이다. 정말로 중요하게 고려해야 하는 것은 극적인, 예상치 못한, 놀라운 예측이다. 그러한 예측이 조금만 있어도 저울을 기울이기에는 충분하다. 이론이 사실에 뒤처지는 경우, 우리는 퇴행적인 프로그램을 다루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과학혁명이 일어나는가? 만일 우리가 2개의 경쟁적인 연구 프로그램을 가지고 있다면, 그리고 그 가운데 하나가 진보적인 프로그램이고 하나가 퇴행적인 프로그램이라면 과학자들은 진보적인 프로그램에 참여하게 된다. 이것이 과학혁명의 합리적 이유이다. 그러나 그 기록[성적표]을 공개적으로 밝히는 것은 지적 정직성의 문제이지만, 퇴행적인 프로그램에 집착하여 그것을 진보적인 프로그램으로 바꾸려 노력한다고 해서 지적으로 정직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포퍼와는 반대로 과학적 연구 프로그램의 방법론은 즉각적인 합리성을 제시하지 않는다. 누구든지 새로 나온 프로그램은 관대하게 다루어야 한다. 프로그램이 땅에 뿌리를 내려 경험적으로 진보하기까지 10년이 걸릴 수도 있다. 반박에 의한 비판은 포퍼가 생각하는 것처럼 이론을 즉각적으로 폐기시키지는 못한다. 중요한 비판은 항상 건설적이다. 더 나은 이론 없이는 반박도 있을 수 없다. 혁명이 갑작스럽고 비합리적인 변화라고 한 쿤의 생각은 잘못이다. 과학의 역사는 포퍼와 쿤을 모두 반박한다. 포퍼적인 결정적 실험과 쿤적인 혁명을 엄밀하게 검토해 보면 그것이 신화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통상적으로 역사에서 일어나는 일은 진보적인 연구 프로그램에 의해 퇴행적인 연구 프로그램이 대치되는 것이다.

과학과 사이비 과학 사이의 구획 기준의 문제는 비판의 제도화에 대해서도 중대한 함축을 갖는다. 1616년에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은 그것이 사이비 과학이라는 이유 때문에 가톨릭 교회로부터 금지당했다. 그 이론은 1820년에 금서 목록에서 해제되었는데, 이는 그 시기가 되어서야 가톨릭 교회에서는 그 이론이 사실에 의해 증명되어 과학적인 이론이 되었다고 판단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1949년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는 멘델의 유전학이 사이비 과학이라는 선언을 하고 그것을 옹호한 학술회 회원인 바빌로프를 강제수용소에서 살해했다. 바빌로프가 살해된 뒤에 멘델의 유전학은 복권되었다. 그러나 무엇이 과학이며, 어떤 이론이 출판될 수 있으며, 무엇이 사이비 과학이며 처벌받아야 하는가를 결정하는 당의 권리는 계속 유지되었다. 우리들이 인종과 지능의 문제에 대한 토론의 경우에서 보아온 바와 같이, 서방의 새로운 자유주의적 기구들은 사이비 과학으로 여겨지는 것에 대해서 언론의 자유를 박탈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모든 판단은 불가피하게 어떤 종류의 구획 기준에 근거할 수밖에 없다. 이것이 바로 과학과 사이비 과학의 구획 기준의 문제가 강단철학의 사이비 문제가 아닌 이유이다. 이 문제는 중대한 윤리적, 정치적 함축을 갖는다.

관련 항목

구획 문제

어떤 분야나 이론이 사이비과학인지를 확인하는 아주 효과적인 방법이 있기는 있다. 그들의 작업이 보통 전문저널이 아닌 책으로 출판된다든가, NSF나 NAS의 지원을 받지 못한다든가 하는 것을 보고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이론이나 연구활동이 사이비과학으로 간주되는 근거에도 관심이 있다. 과학철학자들의 구획 문제라는 이름으로 관심을 가진 것은 바로 그것이다.

어떤 철학자들은 진짜 과학이 가진 필요조건을 제안했는데, 그 필요조건은 일종의 과학/사이비과학의 구획 기준으로 역할을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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