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점성술은 사이비과학인가
Paul R. Thagard, “Why Astrology Is a Pseudoscience”, in Proceedings of the Philosophy of Science Association Vol. 1, eds. P. Asquith and I. Hacking (East Lansing, Mich.: Philosophy of Science Association, 1978), 223-34.
본문
왜 점성술은 사이비과학인가[1]
폴 태거드(Paul R. Thagard)
정동욱 번역
대부분의 과학철학자와 과학사학자들은 점성술이 사이비과학이라는 데 동의하고 있지만, 왜 그것이 사이비과학인지에 대해서는 그다지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다. 그 답변은 검증가능성과 반증가능성의 문제에서부터 진보와 쿤식 정상과학에 대한 질문뿐 아니라, 『휴머니스트』(The Humanist) 잡지에서 최근에 조직한 대규모 과학자 자문단에 의해 제기된 다양한 종류의 반론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물론 파이어아벤트식 무정부주의자들도 있고, 과학과 사이비과학의 구획(demarcation)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나는 어떤 분야를 사이비과학으로 식별해주는 기준을 제안하려고 한다. 검증주의자나 반증주의자들의 시도와 달리, 이 기준은 논리적 특징뿐 아니라 사회적, 역사적 특징도 사용한다.
나는 점성술에 대한 간략한 묘사로 시작하려고 한다. 점성술을 신문이나 대중잡지에서 보는 일상적인 별점을 가지고 평가하는 것은 매우 불공평한 처사일 것이다. 이러한 별점은 오직 태양궁(sun signs)만을 사용하지만, 완전한 별점은 달과 행성들의 영향들도 따지며, 상승궁(ascendant sign)을 비롯해 다른 것들도 논한다.
점성술은 하늘을 12개의 구역으로 나누며, 이 구역들은 황도십이궁(Zodiac)의 물병자리, 천칭자리 등등의 익숙한 별자리들로 표현된다. 태양궁은 탄생시 태양이 점하고 있던 하늘의 구역을 나타낸다. 예를 들어, 9월 23일과 10월 22일 사이에 태어난 사람들은 천칭자리이다. 보통 적어도 태양궁만큼이나 중요한 것으로 가정되는 상승궁은 탄생시 동쪽 지평선에서 떠오르고 있던 하늘의 구역을 나타내며, 따라서 두 시간마다 바뀐다. 이 상승궁을 결정하기 위해서는, 탄생 시각과 장소에 대한 정확한 지식이 필수적이다. 달과 행성들(천왕성, 해왕성, 명왕성을 넣을 것이냐에 따라 5개에서 8개가 되는)도 황도십이궁의 한 구역에 위치한다. 각 행성은 인간 활동의 특별한 영역에 영향력을 행사한다고 한다. 예를 들어, 화성은 추진력과 용기, 대담성을 관장하는 반면, 금성은 사랑과 예술적 활동을 관장한다. 태양, 상승점, 달, 행성들의 영향은 어마어마한 수의 조합이 가능하며, 그 조합이 인간의 성격과 행동과 운명을 결정한다고 한다.
점성술은 고대의 활동으로, 기원전 수천 년에 칼데아 지역에 그 기원을 두고 있는 듯하다. 황도십이궁이 정착한 기원전 700년 무렵 혹은 그 이후 몇 세기에, 황도십이궁의 별자리들은 오늘날의 그것들과 매우 비슷해졌다. 알렉산더 대왕의 정복은 점성술을 그리스로 전파했으며, 이후 로마인들에게도 전해졌다. 점성술은 공화정 말기에 매우 많은 인기를 얻어,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같은 많은 저명인사들도 자신들의 별점을 보았다고 한다. 그러나 루크레티우스나 키케로와 같은 사람들의 반대도 있었다.
점성술은 점점 집대성되어, 기원후 2세기에 쓰여진 프톨레마이오스의 『테트라비블로스』(#20)로 그 절정을 이뤘다. 이 책은 태양, 달, 행성의 힘과 그것들이 인간 삶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매우 자세하게 기술하고 있다. 이 책은 아직도 점성술의 기본 교재로 인식되고 있다. 프톨레마이오스는 점성술을 지리학과 천문학에 관한 그의 유명한 연구만큼이나 진지하게 취급했다. 이는 그가 하늘에 기초하여 예측을 하는 두 가지 가능한 방법을 논하고 있는 『테트라비블로스』의 도입부에 분명하게 드러나 있다. 첫 번째 방법이면서 더 효과적인 것으로 인정받는 방법은 태양과 달과 행성들의 상대 운동을 고려하는 것으로, 이는 프톨레마이오스가 그의 유명한 『알마게스트』(#19)에서 이미 다룬 방법이다. 두 번째 방법으로 여전히 적법한 예측 방법은 “천체들이 둘러싸고 있는 것에 그들이 일으킨 변화를 탐지하기 위해” 천체 운동 양상의 “자연적 특징”을 이용하는 것이다(#20, p. 3). 그는 태양, 달, 행성이 지구에 미치는 기상과 조수와 같은 영향 때문에 이 예측 방법이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유럽의 르네상스는 근대 과학의 시작으로 알려져 있지만, 점성술과 연금술 같은 비술(occult arts)도 융성했다. 아서 케슬러는 케플러의 점성술에 대한 관심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점성술은 케플러의 생계수단이었을 뿐 아니라, 케플러는 ― 과거의 점성술사들의 특정한 분석방법에는 회의적이었지만 ― 점성술에 진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13, pp. 244-248). 점성술은 17세기 지식인들과 일반 대중 모두에게 인기가 있었다. 그러나 점성술은 18세기에 스위프트(#24)나 볼테르(#29)와 같은 계몽주의 사상가들로부터 공격받으면서 그 대부분의 인기를 잃게 되었다. 점성술은 1930년대 이후에야 다시 많은 독자를 확보하게 되었다.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적어도 자신의 태양궁을 알고 있으며, 매우 많은 사람들은 별과 행성들이 그들의 삶에 중요한 영향력을 행사한다고 믿고 있다.
이러한 유행을 뒤집고자, 바트 복, 로렌스 제롬, 폴 쿠르츠는 1975년에 점성술을 공격하는 성명의 초안을 작성했고, 19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포함해 총 192명의 일류 과학자들이 이 성명에 서명을 했다. 이 성명은 세 가지의 주요 문제를 제기했다. 점성술은 마술적 세계관에서 비롯되었으며, 행성들은 점성술의 어떠한 물리적 기초가 되기에 너무 멀리 있으며, 사람들은 그것을 단지 위안거리로 믿고 있다(#2, pp. 9f.). 이 반론의 어떤 것도 점성술을 사이비과학으로 비난하는 근거가 되지 않는다. 이를 보이기 위해, 나는 복(#1)과 제롬(#12)이 이 성명을 뒷받침하기 위해 쓴 글을 짧게 검토할 것이다.
복에 따르면, 점성술이 어떤 종류의 물리적 기초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입증되지 않는 한, 점성술적 예측에 대한 통계적 시험을 하는 것은 시간 낭비이다(#1, p. 31). 그러한 [물리적] 기초가 없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 그는 별과 행성의 중력과 복사 효과가 작다는 점을 이용한다. 그는 또한 점성술에 대한 믿음의 심리[상태]를 검토했는데, 이에 따르면 그것은 심각한 개인적 문제의 해법을 구하던 개인들의 자포자기의 결과이다. 제롬은 자신의 글 대부분에서 점성술의 기원이 마술적 대응 원리에 있다는 것을 보이는 데 힘을 쏟는다. 그는 점성술이 과학보다는 마술의 체계이며, 점성술이 “[행성의] 세차 운동이나 출생 혹은 임신 시각에 대한 정확한 지식 부족에 기인한 어떠한 부정확성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의 해석과 예측이 고대의 마술적 세계관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에”(#12, p. 46) 실패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그러나 점성술의 통계적 시험도 분명히 검토하고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아래에서 다시 논할 것이다.
이러한 반론들은 점성술이 사이비과학임을 보이고 있지 않다. 첫째, 기원은 과학적 지위와 무관하다. 화학의 연금술적 기원(#11, pp. 1-18)과 의학의 비술적 출발(#8)은 점성술의 기원만큼이나 마술적이며, 역사가들은 뉴턴과 아인슈타인과 같은 많은 위대한 과학자들에게 미친 신비주의의 영향을 발견해왔다. 따라서 점성술은 단지 그 원리가 마술적 기원을 가진다는 이유로 비난받을 수 없다. 이와 비슷하게, 대중적 믿음의 심리도 그 자체로는 점성술의 지위와 무관하다. 사람들은 종종 좋은 이론조차도 부절적한 이유로 믿으며, 대부분의 사람들이 점성술을 개인적, 비합리적 이유로 믿는다 하더라도, 좋은 이유가 있을 수는 있다.[2] 마지막으로 물리적 기초의 결여는 그다지 이론을 비과학적인 것으로 규정해주는 것 같지 않다(#22, p. 2). 이를 뒷받침하는 사례는 다음과 같다. 베게너(#31)가 대륙이동설을 제안했을 때에는 그에 대한 어떠한 메커니즘도 알려져 있지 않았으며, 흡연과 암 사이의 연결은 그 발암 현상의 세부 사항들이 아직 발견되지 않았음에도 통계적으로 확립되었다(#28). 따라서 복과 제롬과 쿠르츠의 반론은 점성술을 사이비과학으로 규정하는 데 실패한다.
이제 우리는 검증가능성과 반증가능성의 기준을 점성술에 적용해 보아야 한다. 거칠게 말해, 이론은 그것으로부터 관찰 진술이 도출될 수 있으면 검증가능하다고 얘기된다. 그러면, 원리적으로, 관찰은 이론을 입증(confirm)하거나 반입증(disconfirm)하는 데 사용될 수 있다. 이론은 오직 검증가능할 때에만 과학적이다. 검증 원리의 변천과정은 여기서 다시 얘기하기엔 너무 잘 알려져 있다(#9, ch. 4). 이 원리를 명료하게 만들고자 했던 A. J. 에이어의 시도는 과학의 대부분을 비과학으로 배제시키거나 혹은 반대로 아무것도 배제시키지 못하는 바람에 실패했다. 게다가, 이론/관찰 구분은 점점 의문시되었다. 결국 남은 것은 어쨌든 시험가능성이 과학적 이론의 표식이라는 모호한 생각뿐이다(#9, ch. 4; #10, pp. 30-32).
이제 살펴보면, 점성술은 모호하게 시험가능하다. 법칙이라기보다는 경향성에 의존하는 영향이 너무 많기 때문에, 점성술은 정확한 예측을 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규모 조사와 통계적 평가를 이용하여 이러한 경향성의 실재성을 시험하려는 시도는 있었다. 이 분야의 개척자는 미셀 고클랭으로, 그는 25,000명의 프랑스인의 직업과 탄생 시각을 검토했다. 점성술은 특정한 별자리나 행성 아래 태어난 사람들이 특정한 직업을 택하기 쉽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호전적인 행성인 화성의 영향은 군인이나 운동선수를 만들어내지만, 금성은 예술적 영향을 준다. 특히, 고클랭은 직업과 태양궁, 월궁(moon sign), 상승궁 사이에 아무런 유의한 상관관계도 발견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사람들의 특정 직업과 특정 출생 시점의 특정 행성의 위치 사이에 통계적으로 흥미로운 일부 상관관계를 정말로 발견했다(#5, ch. 11; #6). 예를 들어, 점성술이 제안한 것처럼, 운동선수와 화성 사이나 과학자와 토성 사이에는 ― 이 행성은 각 개인의 출생 시점에 뜨고 있거나 천정에 있었다 ― 더 높은 연관성이 있었다.
이러한 발견과 그 해석들은 매우 논쟁적이며, 이후 연구들도 비슷하다(#7). [이 연구 결과들은] 옳다 하더라도, 그것들은 ― 특히, 가장 중요한 점성술적 범주에서 발견된 부정적인 결과들을 고려하면 ― 점성술을 거의 검증해주지 않는다. 내가 고클랭을 인용한 이유는, 통계적 기법을 사용하면 점성술이 적어도 검증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즉, 검증 원리는 점성술을 사이비과학으로 규정해주지 않는다.
점성술사들의 예측은 대체로 모호하기 때문에, 포퍼주의자라면 점성술의 진짜 문제는 그것이 반증가능하지 않다는 것이라고 주장할지 모른다. 즉 점성술사들은 만약 성공하지 못했을 경우 그들로 하여금 자신의 이론을 포기하도록 만드는 그런 예측을 만들어낼 수 없다. 즉, 점성술은 반증불가능하기 때문에 비과학적이다.
그러나 반증가능성 원칙은 뒤앙(#4), 콰인(#21), 라카토슈(#15)에 의해 묘사된 심각한 문제에 직면한다. 포퍼 스스로도 일찍이 지적한 바 있지만, 관찰은 반증을 결코 보장하지 않는다. 이론은 언제나 보조가설을 도입하거나 수정함으로써 유지될 수 있으며, 관찰 진술조차도 교정불가능(incorrigible)한 것이 아니다(#17, p. 50). 무엇을 손댈 수 있는가에 대한 방법론적 결정에서 반증의 회피는 금지되어야 한다. 그러나 라카토슈는 시험에 앞서 그런 결정을 하는 것은 자의적이며, 때로는 반-반증주의적 전략을 통해 구제되어야 했을 정상적인 이론을 성급하게 폐기하게 될 수 있다고 강하게 주장한 바 있다(#15, pp. 112ff). 반증은 더 나은 이론이 나타날 때에만 발생한다. 그러면 반증가능성은 다른 이론에 의한 교체의 문제에 불과한 것이 되며, 점성술은 원리상 다른 이론으로 교체가능하기 때문에, 반증가능성은 점성술을 사이비과학으로 거부할 아무런 기준도 제공하지 않는다. 우리는 고클랭에 대한 논의에서, 점성술이 통계적 규칙성에 대한 예측을 만들어내는 데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을 확인했지만, 그러한 규칙성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점성술을 반증하지 않는다. 여기서 점성술은 최선의 과학 이론보다 나빠 보이진 않으며, 대안 이론이 나타날 때까지 반증에도 저항하게 된다.[3]
검증주의자와 반증주의자, 또는 복과 제롬에 의해 제안된 근거로는, 점성술을 사이비과학으로 비난할 수 없다. 그러나 분명 점성술은 오늘날 엄청나게 많은 미해결 문제들에 직면에 있다(#32, ch. 5). 하나는 고클랭에 의해 발견된 직업과 별자리 사이의 부정적인 결과이다. 다른 하나는 [춘/추]분점의 세차 문제로, 점성술사들은 보통 이를 “물병자리 시대”(역자주 : 1960년대에 시작해서 2000년간 지속된다는 새로운 자유의 시대)의 도래를 예고할 때 고려에 넣지만 표를 계산할 때는 완전히 무시한다. 점성술사들은 프톨레마이오스 이후에 발견된 세 개의 행성 해왕성, 천왕성, 명왕성의 의미에 대해서도 합의된 의견이 없다. 쌍둥이에 대한 연구는 점성술이 제안하는 개인 성격과 운명의 유사성을 보여주지 않는다. 점성술은 매우 다른 별점을 가진 수많은 개인들이 비슷한 종말을 맞게 되는 대형 재난도 설명하지 못한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들은 그 자체로는 점성술이 거짓이라거나 사이비과학이라는 것을 보여주지 않는다. 최고의 이론조차도 그들의 역사에서 미해결 문제에 직면한다. 점성술과 과학을 구획하는 기준을 마련하기 위해서, 우리는 더 넓은 역사적 맥락과 사회적 맥락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구획 기준은 이론, 공동체, 역사적 맥락 세 가지 요소로 이루어진 행렬을 필요로 한다. 첫 번째 표제어 “이론”에는 구조, 예측, 설명, 문제 풀이와 같은 익숙한 문제들이 포함된다. 이론이 물리적 기초를 갖추고 있는지에 대해 복과 제롬이 제기한 문제도 여기에 포함시킬 수 있다. 이전의 구획론자들은 이 이론적 요소에 집중해 왔는데, 검증 원리와 예측에 기반한 반증 원리에 대한 고려는 분명히 이러한 요소에 해당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접근이 점성술을 사이비과학으로 규정하는 데 충분치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
우리는 이론 옹호자들의 공동체도 고려해야 한다. 이 경우엔 점성술 종사자들의 공동체가 될 것이다. 여기서는 몇 가지 질문이 중요하다. 첫째, 종사자들은 이론의 원리들과 이론이 직면한 문제를 어떻게 풀어나갈지에 대해 동의하고 있는가? 둘째, 그들은 노력을 하고 있는가, 다시 말해, 그들은 변칙사례를 설명하고 자기 이론의 성공을 다른 이론의 성공 기록과 비교하는 데 관심이 있는가? 셋째, 종사자들은 자신들의 이론을 입증하거나 반입증하는 시도에 적극적으로 관여하고 있는가? 이론의 성공을 다른 이론의 성공과 비교하는 것에 대한 질문은 행렬의 세 번째 요소, 즉 역사적 맥락을 끌어들인다. 쿤을 비롯한 다른 사람들의 역사적 연구에 따르면, 이론은 대체로 (1) 시간적으로 오랜 기간에 걸쳐 변칙에 직면하고 (2) 그것이 다른 이론에 의해 도전받을 때에만 거부된다. 따라서 역사적 맥락의 표제 아래, 우리는 구획과 관련된 두 가지 요소, 즉 시간에 걸쳐 새로운 사실을 설명하고 변칙들을 처리해 온 이론의 성적표와 대안 이론의 이용가능성을 고려해야 한다. 우리는 이제 다음의 구획 원리를 제안할 수 있다.
- 과학이길 의도한 이론 혹은 분야는 다음과 같은 경우, 오직 그 경우에만 사이비과학이다:
- 오랜 기간 동안 대안 이론에 비해 덜 진보적이었으며, 많은 미해결 문제에 직면해 있다. 그러나
- 종사자 공동체는 문제의 해결을 위해 이론을 발전시키려는 시도를 거의 하지 않으며, 이론을 다른 이론과 비교 평가하려는 시도에 아무런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입증과 반입증을 고려하는 데 선택적이다.
진보성은 설명된 사실과 풀린 문제의 집합에 무언가를 추가하는 데 이론이 얼마나 성공적인지에 대한 문제이다(#15, p. 118; cf. #26, p. 83).
이 원리는, 내가 믿기에, 점성술에 대해 무엇이 가장 주되게 비과학적인지를 포착하고 있다. 첫째, 점성술은 극적으로 비진보적이다. 즉 그것은 거의 변하지 않았으며 프톨레마이오스 이래 그 설명력에 추가된 것이 아무것도 없다. 둘째, 분점의 세차와 같은 문제는 미해결 상태에 있다. 셋째, 성격과 행동에 대한 이용가능한 대안 이론이 존재한다. 19세기 이후 점성술이 하늘의 영향으로 설명하던 많은 현상들을 설명하기 위해 심리학 이론들이 확대되어 왔다는 것을 보기 위해 행동주의나 프로이트 혹은 게슈탈트 이론에 대한 무비판적인 옹호자가 될 필요는 없다. 중요한 점은 이 심리학 이론들이 확립되었다거나 참이라는 것이 아니다. 다만 오랫동안 정체되어 있는 점성술에 비해 그것들은 성장하는 대안들이라는 것뿐이다. 마지막으로 넷째, 점성술사들의 공동체는 대체로 미해결 문제들을 해결하거나 자신의 이론을 다른 이론과 비교하여 평가하는 데 별 관심이 없다.[4] 이러한 근거로, 나의 기준은 점성술을 사이비과학으로 규정한다.
이 구획 기준은 라카토슈나 쿤이 암묵적으로 제시했던 기준들과 다르다. 라카토슈는 연구 프로그램을 구성하는 일련의 이론들을 과학적으로 만들어 주는 것은 그것의 진보성이라고 말했었다. 즉 [진보적인 연구 프로그램에서] 일련의 각 이론은 그 선행 이론보다 입증된 내용을 더 많이 가지고 있다(#15, p. 118). 나는 진보성이 여기서 핵심적인 개념이라는 데 라카토슈와 의견이 일치하지만, 그것만으로는 과학을 사이비과학과 구분하는 데 충분하지 않다. 어떤 진보적이지 않은 분야가 그보다 진보적인 대안이 존재함에도 그렇게 유지되고 있는 것이 아닌 한, 그 분야에 사이비과학의 딱지를 붙여서는 안 된다. 점성술에 대한 쿤의 논의는 내 기준의 다른 측면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는 점성술을 비과학적으로 만드는 것은 그가 정상과학이라 부른 것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 패러다임 중심의 퍼즐 풀이 활동의 부재라고 말한다(#14, p. 9). 그러나 왓킨스는 점성술사들이 어떤 점에서는 전형적인 정상과학자라고 주장한다. 즉 그들은 스스로 개인 별점 수준의 퍼즐 풀이에 골몰하지만, 그들의 일반 이론이나 패러다임의 기초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다(#30, p. 32). 따라서 그러한 정상과학의 특징은 과학과 사이비과학을 구분해주지 못한다. 점성술을 사이비과학으로 만들어 주는 것은 그것이 쿤식 정상과학기를 결여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더 진보적인 대안 이론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그 옹호자들이 “정상”과학자들의 무비판적인 태도를 채택하고 있기 때문이다. (쿤의 정상과학자들이 비과학적이라는 포퍼(#18)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 주의하라. 그들은 오직 대안 패러다임이 발달했을 때에만 비과학적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만약 개별적인 별점 수준에서의 퍼즐 풀이를 보지 않고 분점의 세차 운동과 같은 이론적인 문제 수준에서의 퍼즐 풀이를 본다면, 나의 기준과 쿤의 기준 사이에는 어느 정도 일치하는 면이 있다. 점성술사들은 이론적 문제 풀이에 대해 패러다임이 제공하는 확신을 가지고 있지 않다.
물론 나의 기준은 점성술 외의 분야에도 적용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검토를 해보면, 이 기준은 마술(witchcraft)이나 피라미드학(pyramidology)과 같은 활동은 사이비과학으로 규정해 주는 반면, 현대 물리학과 화학, 생물학은 건드리지 않을 것이다. 점성술과 마찬가지로 생일에 기반하고 있는 믿기 어려운 바이오리듬의 현재 유행은 사이비과학으로 규정될 수 없다. 왜냐하면 많은 연구가 진행 중이긴 하나, 인간의 주기적인 변화에 대해 더 자세한 설명을 제공하는 대안 이론이 없기 때문이다.[5]
이 기준의 한 가지 흥미로운 귀결은 한 이론이 한 때에는 과학이다가 다른 때에는 사이비과학일 수 있다는 것이다. 프톨레마이오스의 시대에는, 혹은 케플러의 시대에도, 점성술 외에 인간의 성격과 행동을 설명하는 대안이 거의 없었다. 존재하는 대안은 거의 다 점성술보다 세련되지도 입증되지도 않았다. 따라서 현대에는 점성술이 사이비과학일지라도, 고대나 르네상스 시대에는 점성술이 사이비과학으로 간주될 수 없다. 프톨레마이오스와 케플러에게 점성술은 단지 엇나간 부업이 아니라, 과학 활동의 일부였다. 물론 오늘날 점성술에 손을 대는 물리학자는 당연히 미심쩍어 보이겠지만 말이다. 사이비과학이 변치 않는 범주로 취급될 수 있는 것은 과학의 역사적 사회적 측면이 무시되었을 때뿐이다. 합리성은 영원히 변치 않는 관념의 속성이 아니다. 행위와 마찬가지로, 관념도 한 때에는 합리적이다가 다른 때에는 비합리적일 수 있다. 따라서 역사적 시기에 따라 과학/사이비과학의 구분을 상대화하는 것은 바람직한 결과이다.
그러나 풀기 어려운 역사적 문제가 하나 남아 있다. 나의 기준에 따르면, 점성술은 19세기에 현대적인 심리학이 떠오르면서 사이비과학이 되었다. 그러나 점성술은 18세기 초 무렵 이미 과학계에서 사실상 쫓겨난 상태였다. 어떻게 이럴 수 있는가? 간단한 답은 이론이 사이비과학의 자격을 얻기 전에도 가망 없는 프로젝트처럼 보이는 것이 충분히 가능하다는 것이다. 코페르니쿠스 혁명과 뉴턴, 데카르트, 홉스의 역학은 점성술의 그럴듯함을 갉아먹었다.[6] 린 손다이크(#27)는 땅의 사람과 동물들 같은 아랫것들(inferiors)이 별과 행성 같은 윗것들(superiors)의 지배를 받는다는 수용된 보편 자연 법칙을 뉴턴 이론이 어떻게 밀어냈는지 보여주었다. 윌리엄 스톨만(#23)은 17세기 과학의 엄청난 성장이 점성술의 지체와 얼마나 대비되었는지 보여주었다. 이러한 발전들은 점성술을 유망주 목록에서 빼버릴 좋은 이유들을 제공했지만, 이들만으로는 점성술을 사이비과학으로 규정하기에 충분치 않았으며, 틀린 것으로 논박하기에도 충분치 않았다.
그 사회적 측면 때문에, 나의 기준은 일종의 문화 상대주의를 시사할 수 있다. 남아메리카 정글에 대안들을 알지 못한 채 자신들의 점성술을 고수하고 있는 고립된 점성술사 집단이 있다고 가정해보자. 그들에게 점성술은 과학적이라고 말해야 할까? 아니면, 반대로, 우리는 외계인이나 사용할 수 있는 대안 이론들과 미래에나 상상할 수 있는 대안 이론들을 대안으로 취급해야 할까? “대안”을 이렇게 넓게 구성하면, 현재 우리가 가진 최선의 이론도 어쩌면 사이비과학이 될 것이다. 위의 두 질문은 대안에 대해 각각 너무 좁거나 너무 넓은 관점을 취했다. 대안 이론이라는 것을 통해, 나는 이 세계에서 일반적으로 이용 가능한 것을 의도하고 있다. 이는 첫째로, 공동체가 접근할 수 있는 일종의 커뮤니케이션 네트워크가 있다는 것을 가정한다. 둘째로, 대안을 찾는 것은 개인들과 공동체들의 책임이라는 것을 가정한다. 나는 (아마도 쿤에 반대하여) 이 두 번째 가정이 합리성의 일반적인 특징이라고 주장하고 싶다. 이는 적어도 문제 회피(ostrichism)를 사이비과학 판정에 대한 방어책으로 사용하는 것은 막아줄 수 있을 것이다.
끝으로, 나는 사이비과학이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는지에 대한 질문이 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지 얘기하고자 한다. 논리경험주의자들과 달리, 나는 반-형이상학의 도끼날을 갈고 있지 않으며, 포퍼와도 달리, 나는 반-프로이트나 반-마르크스의 도끼날도 갈고 있지 않다.[7] 나의 관심은 사회적인 것이다. [현대] 사회는 과학의 진보에 대한 공적 무관심과 동시에 현재 과학과 기술에서 떠오르고 있는 중요한 윤리적 문제 ― 예컨대, 유전공학의 문제를 둘러싼 ― 에 대한 공적 무관심이라는 쌍둥이 문제에 직면해 있다. 이러한 이중의 무관심의 한 가지 원인은 사이비과학과 신비주의(occult)의 광범위한 대중적 인기이다. 과학이 사이비과학과 어떻게 다른지를 해명하는 일은 진짜 과학에 대한 대중적 무관심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 중 철학이 담당해야 하는 몫이다.
주석
- ↑ 댄 하우스만(Dan Hausman)과 엘리아스 바움가르텐(Elias Baumgarten)의 논평에 감사를 표한다.
- ↑ 그러나 만약 별점이 칭찬이나 즐거운 예측에 덜 사용되고, 『마더 존스』(Mother Jones) 1977년 12월호의 풍자적인 별점에 나온 다음의 “처녀자리 : 8월 23일-9월 22일”과 같은 종류의 분석 쪽으로 더 치우친다면, 점성술은 분명 매우 적은 지지자만 남게 될 것이다. “처녀자리”에 따르면, 당신은 논리적인 유형이면서 무질서를 혐오한다. 당신의 잔소리는 당신의 친구들을 괴롭히고 있다. 당신은 냉정하고 침착하며 때로는 사랑 중에도 잠이 든다. 처녀자리는 좋은 버스 운전수가 될 수 있다.
- ↑ 이론의 비교 평가에 대해서는, (#26)을 보라.
- ↑ 약간의 예외가 있는 듯하다. (#32)를 보라.
- ↑ 이제는 대중적 출판물에서 점성술과 자리를 겨눌 정도로 인기를 얻고 있는 바이오리듬은 프랭크 브라운(Frank Brown)을 비롯한 다른 사람들의 바이오리듬에 대한 매우 흥미로운 연구와는 구별되어야 한다. 이에 대한 조사는 (#5)를 보라.
- ↑ 그럴듯함은 가설이 적절한 종류의 가설이 되기 위한 척도 중 하나이며, 이론의 수용에도 관련이 있다. (#26)의 90쪽과 (#25)를 보라.
- ↑ 정신분석학에 대해서는 (#3)을 보라. 나는 시오피(Cioffi)가 정신분석학의 대안에 대한 질문과 그 진보성에 대한 질문을 간과했다고 생각한다.
참고문헌
- Bok, Bart J. “A Critical Look at Astrology.”, In #2. Pages 21-33.
- --------------, Jerome, Lawrence E., and Kurts, Paul. Objections to Astrology. Buffalo: Prometheus Books, 1975.
- Cioffi, Frank. “Freud and the Idea of a Pseudoscience.” In Explanation in the Behavioral Sciences. Edited by R. Borger and F. Cioffi.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70. Pages 471-499.
- Duhem, P. The Aim and Structure of Physical Theory. (trans.) P. Wiener. New York: Atheneum, 1954. (Translated from 2nd edition of La Théorie Physique: Son Object Sa Structure. Paris: Marcel Rivière & Cie, 1914.)
- Gauquelin, Michel. The Cosmic Clocks. Chicago: Henry Regnery, 1967.
- -----------------. The Scientific Basis of Astrology. New York: Stein and Day, 1969.
- -----------------. “The Zelen Test of the Mars Effect.” The Humanist 37 (1977): 30-35.
- Haggard, Howard W. Mystery, Magic, and Medicine. Garden City: Doubleday, Doran & Company, 1933.
- Hempel, Carl. Aspects of Scientific Explanation. New York: The Free Press, 1965.
- ------------. Philosophy of Natural Science. Englewood Cliffs: Prentice-Hall, 1966.
- Ihde, Aaron J. The Development of Modern Chemistry. New York: Harper and Row, 1964.
- Jerome, Lawrence E. “Astrology: Magic or Science?” In #2. Pages 37-62.
- Koestler, Arthur. The Sleepwalkers. Harmondsworth: Penguin, 1964.
- Kuhn, T.S. “Logic of Discovery or Psychology of Research?” In #16. Pages 1-23.
- Lakatos, Imre. “Falsification and the Methodology of Scientific Research Programmes.” In #16. Pages 91-195.
- ------------- and Musgrave, Alan. (eds.). Criticism and the Growth of Knowledge.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70.
- Popper, Karl. The Logic of Scientific Discovery. London: Hutchinson, 1959. (Originally published as Logik der Forschung. Vienna: J. Springer, 1935.)
- ------------. “Normal Science and its Dangers.” In [16]. Pages 51-58.
- Ptolemy. The Almagest (The Mathematical Composition). (As printed in Hutchins, Robert Maynard (ed.). Great Books of the Western World, Volume 16. Chicago: Encyclopedia Britannica, Inc., 1952. Pages 1-478.)
- --------. Tetrabiblos. Edited and translated by F.E. Robbins. Cambridge: Harvard University Press, 1940.
- Quine, W.V.O. “Two Dogmas of Empiricism.” In From a Logical Point of View. New York: Harper & Row, 1963. Pages 20-46. (Originally published in The Philosophical Review 60 (1951): 20-43.)
- Sagan, Carl. “Letter.” The Humanist 36 (1976): 2.
- Stahlman, William D. “Astrology in Colonial America: An Extended Query.” William and Mary Quarterly 13 (1956): 551-563.
- Swift, Jonathan. “The Partridge Papers.” In The Prose Works of Jonathan Swift, Volume 2. Oxford: Basil Blackwell, 1940-1968, Pages 139-170.
- Thagard, Paul R. “The Autonomy of a Logic of Discovery.” Forthcoming in the Festschrift for T.A. Goudge.
- ---------------. “The Best Explanation: Criteria for Theory Choice.” Journal of Philosophy 75 (1978): 76-92.
- Thorndike. Lynn. “The True Place of Astrology in the History of Science.” Isis 46 (1955): 273-278.
- U.S. Department of Health, Education and Welfare. Smoking and Health: Report of the Advisory Committee to the Surgeon General of the Public Health Service. Washington, D.C.: U.S. Government Printing Office, 1964.
- Voltaire. “Astrologie” and “Astronomie”. Dictionnaire Philosophique. In Oeuvres Complètes de Voltaire, Volume XVII. Paris: Garnier Frères, 1878-1885. Pages 446-453.
- Watkins, J.W.N. “Against ‘Normal Science’.” In #16. Pages 25-37.
- Wegener, Alfred. “Die Entstehung der Kontinente.” Petermanns Geographische Mitteilung 58 (1912): 185-195, 253-256, 305-309.
- West, J.A. and Toonder, J.G. The Case for Astrology. Harmondsworth: Penguin, 1973.
관련 항목
구획 문제
- Karl Popper, Science: Conjectures and Refutations (번역)
- Thomas S. Kuhn, Logic of Discovery or Psychology of Research? (번역)
- Imre Lakatos, Science and Pseudoscience (번역)
- Paul R. Thagard, Why Astrology Is a Pseudoscience (번역)
- Michael Ruse, Creation-Science Is Not Science (번역)
- Larry Laudan, Commentary: Science at the Bar - Cause for Concern (번역)
- Michael Ruse, Response to the Commentary: Pro Judice
- David Resnik, "A Pragmatic Approach to the Demarcation Problems", Studies in History and Philosophy of Science 31 (2000): 249-267.
- Michael Ruse ed., But Is It Science?, Prometheus (19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