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과학은 과학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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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chael Ruse, “Creation-Science Is Not Science”, in Curd & Cover (eds.)(1998), Philosophy of Science: The Central Issues, pp. 38-47; originally from Science, Technology, and Human Value 7 no. 40 (Summer 1982), 72-78.


창조과학은 과학이 아니다

마이클 루즈 (정동욱 번역)


1981년 12월, 나는 교사들에게 “창조과학”과 진화론에 대한 “공평한 대우”를 제공하도록 요구한 아칸소 주 법률 590호에 대한 고소인과 미국시민자유연맹(ACLU, American Civil Liberties Union)의 성공적인 문제제기를 위해 전문가 증인으로 출석했다.[1] 나의 출석은 약간의 놀라움을 주었는데, 왜냐하면 나는 과학사가 겸 과학철학자이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 나는 나의 출석이나 나의 직업에 대해 사과를 하지도 않을 것이며, 지난 승리를 되새김하려 하지도 않을 것이다.[2] 다만, 나는 왜 과학철학자 겸 과학사가가 과학 수업에서 “창조과학”을 가르치는 것에 대해 불쾌함을 느끼는지 설명하고 싶을 뿐이다.

분명히, 사안의 핵심―고소인의 소송의 핵심―은 창조과학의 지위이다. 그 옹호자들은 그것이 진정한 과학이며 따라서 공립 학교에서 적법하게 또 적절히 가르쳐질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 반대자들은 그것이 진정한 과학이 아니라 종교의 일종―다른 말로는 교조적인 성서 문자주의―이라고 주장한다. 과연 창조과학은 무엇이며, 누가 그것을 결정할 것인가?

이 사안의 결정에 누가 참여해야 하는지를 묘사하는 것은 다소 쉬운 편이다. 한편으로, 어떤 이는 자연스럽게 종교인과 신학자들의 권위에 호소할 것이다. 창조과학은 종교의 수용된 정의에 부합하는가? (아칸소 주에서, ACLU는 정말로 그렇다고 말하는 신학자들을 보여주었다.) 누군가는 과학자들의 권위에 호소할 것이다. 창조과학은 과학의 현재 정의에 부합하는가? (아칸소 주에서, ACLU는 정말로 그렇지 않다는 과학자들을 보여주었다.)[3]

말하자면(as it were), 현직 종사자들―신학자와 과학자―에게 호소하다 보면, 여전히 연결이 빠진 것 같다. 누군가는 과학―무슨 과학이든―의 본성에 대해 보다 이론적인 수준에서 얘기하여, 창조과학은 단지 그 부분에 맞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 철학자이자 역사가로서, 과학을 살펴보고, 그래서 그것을 정의하는 특징에 대한 정확히 그런 질문을 묻는 것은 나의 직업이다.

과학이란 무엇인가?

지금까지 “과학”이라 불려온 모든 것들을 그리고 오직 그것들만을 분리시켜주는 ― 필요충분조건을 명세하는 ― 깔끔한 정의를 제공하는 것은 그리 가능하지 않다. “과학”이란 개념은 “삼각형”과 같은 개념과 달리 쉽게 정의할 수 없다. 과학은 시대를 거쳐 발전해온 현상으로, 종교, 철학, 미신, 인간의 다른 견해와 믿음들로부터 떨어져 나왔다.[4]

우리가 오늘날 “과학”이라 부르는 것은 꽤 두드러지고 독특한 주장들의 집합으로, 많은 특유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여느 대부분의 것들과 마찬가지로, 어떤 것들은 과학과 비과학의 경계선에 위치한다(e.g., 아마도 프로이드 정신분석학). 그러나 다음은 분명히 얘기할 수 있다. 예컨대 물리학과 화학은 과학이며, 플라톤의 이데아 이론과 스웨덴보리의 신학(Swedenborgian theology)은 과학이 아니다.[5]

[과학을] 정의하는 특징을 찾는 데 있어, 확실한 출발 지점은 과학의 가장 두드러진 측면, 즉 과학은 실제 감각 세계에 대한 경험적 활동이라는 점이 될 것이다. 이는 과학이 관찰 가능한 존재자만을 다룬다는 것을 말하진 않는다. 모든 성숙한 과학은 전자와 유전자처럼 관찰 불가능한 것들을 포함하지만, 궁극적으로 그것들은 우리를 둘러싼 세계를 지칭한다. 과학은 이 경험 세계를 이해하려고 시도한다. 이러한 이해의 기초는 무엇인가? 오늘날 과학과 과학사를 살펴보면 한 가지가 두드러진다. 과학은 질서에 대한 탐색과 관련되어 있다. 보다 구체적으로, 과학은 깨지지 않는, 맹목적인, 자연적 규칙들(법칙들)을 찾는다. 세계 속의 일들은 단지 아무렇게나 일어나지 않는다. 그것들은 정해진 경로를 따르며, 과학은 이러한 사실을 포착하기 위해 애쓴다. 따라서 “이론” 혹은 “패러다임” 혹은 “모형들의 집합”으로 다양하게 얘기되는 과학의 몸통은 법칙들의 집합이다.[6]

즉, 뉴턴 물리학에서 우리는 뉴턴의 세 가지 운동 법칙과 만유인력의 법칙, 케플러의 행성 운동 법칙 등등을 보게 된다. 이와 비슷하게, 집단 유전학에서 우리는 하디-와인버그(Hardy-Weinberg) 법칙을 보게 된다. 그러나 철학과 같은 것에 눈을 돌리면, 우리는 그와 같은 경험 법칙에 대한 호소를 보지 못한다. 사실, 종교적 믿음은 빈번하게 법칙 바깥의 사건 혹은 법칙을 위반하는 사건(기적)을 허용하거나 가정한다. 이는 종교가 거짓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며, 단지 종교는 과학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빵과 물고기가 수많은 사람을 먹일 만큼 크게 늘어났을 때, 그것은 자연 법칙을 따르지 않는 일이 벌어진 것이며, 따라서 5000명을 먹인 일은 과학의 범위 바깥의 사건인 것이다.[7]

과학적 활동의 주요한 부분은 설명을 하는 데 법칙을 사용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누군가 왜 그러한 일이 벌어지는지 ― 그리고 그것들이 어떻게 영향을 받는지(fall beneath) 혹은 (어쩌면 어떤 명세된 초기 조건들과 함께) 법칙으로부터 따라 나오는지 ― 보이려고 한다. 예컨대, 왜 포탄은 원형이 아닌 포물선으로 움직이는가? 뉴턴의 법칙에 의한 제약 때문이다. 왜 파란 눈의 두 부모는 항상 파란 눈의 아이를 가지는가? 유전자가 눈 색깔을 결정하는 특정한 방식이 주어진 상황에서, 이 형질이 멘델의 법칙을 따르기 때문이다. 과학적 설명은 법칙에 호소해야 하며 설명 중인 일이 일어나야 했다는 것을 보여야 한다. 설명은 일어나지 않은 다른 일의 가능성을 차단한다. 법칙과 그것이 설명한 것 사이의 정확한 관계에 대해서는 상당한 논쟁이 벌어지고 있는 중이다. 오늘날, 나는 대부분이 그 관계가 상당히 단단해야 한다―피설명항은 반드시 따라 나와야 한다―는 데 동의할 것이라고 생각한다.[8]

설명의 뒷면에는 예측이 있다. 법칙들은 무엇이 벌어질지를 알려준다. 즉, 공은 포물선으로 움직일 것이며, 아이는 파란 눈이 될 것이다. 미래학과 마찬가지로 과학에서는, 이를테면 과거에 대해서도 예측할 수 있다. 법칙을 사용하여, 우리는 지금까지 몰랐던 어떤 현상이나 사건이 과거에 일어났다는 것을 추론할 수 있다. 즉, 예컨대, 우리는 물리학을 법칙을 사용하여 고문헌에 기록된 일식을 역으로 추론할 수 있다.

시험가능성은 설명과 예측이란 쌍둥이 개념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진정한 과학 이론은 실제 세계와 대조할 기회를 제공한다. 과학자는 설명과 예측에 의해 만들어지는 추론들이 실제로 자연에서 획득되는지 볼 수 있다. 화학 반응이 예상한 대로 일어나는가? 영의 이중 슬릿 실험에서, 파동 이론에 의해 예측된 빛과 어둠의 띠들이 발견되는가? 대륙 이동의 흔적은 나타나는가?

시험가능성은 이중의 과정이다. 연구자는 긍정적인 증거, 즉 입증을 추구한다. 경험적 뒷받침이 없는 과학 이론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물론 분명히 최근의 이론은 오래된 이론보다 덜 뒷받침되긴 할 것이다). 역으로, 이론은 가능한 반박에 노출되어 있어야 한다. 만약 사실이 이론에 반한다면, 이론이 떠나야 한다. 과학의 몸통은 반증 가능해야 한다. 예컨대, 케플러의 법칙은 거짓이 될 수도 있었다. 다시 말해, 만약 행성이 사각형으로 움직인다는 것이 발견되었다면, 그 법칙은 잘못된 것으로 밝혀졌을 것이다. 그러나 비과학과 과학을 구분하는 데 있어, 예컨대, 어떤 경험적 증거도 사람을 도구가 아닌 목적으로 대하라는 칸트의 철학적 주장이 틀렸다는 것은 증명할 수 없다. 이와 비슷하게, 화체설(化體說, transubstantiation : 빵과 술이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했다는)에 관한 기독교의 종교적 주장도 반증 불가능하다. 반증가능성은 오늘날 철학과 과학 문헌에서 높은 관심을 받고 있다. 특히 대다수의 과학자들은 반증가능성이 과학과 비과학을 구분짓는 진정한(the) 기준이라고 주장한 칼 포퍼에 동의한다(특히 그의 Logic of Scientific Discovery를 보라). 나의 입장은 반증가능성은 중요한 부분이긴 하지만, 과학과 비과학을 구분짓기 위해 필요한 다양한 특징 중 단지 일부일 뿐이라는 것이다.[9]

과학은 잠정적이다. 궁극적으로, 과학자는 자신의 이론을 거부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불행히도, 모든 과학자가 그들이 이론에 대해 하기로 약속한 것을 실제로 집행할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개개인의 나약함은 집단으로서의 과학자들이 새롭거나 재고된 증거에 답하는 데 실패한 이론들을 정말로 포기한다는 사실에 의해 보완된다. 예컨대, 최근 30년 동안 지질학자들은 대륙이 절대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그들의 강한 확신을 뒤집었다.

물론 과학자들이 반대 증거가 나타날 때마다 바로 자신의 이론을 버리는 것은 아니다. 이론이 강력하고 성공적이라면, 약간의 문제는 용서될 수 있지만, 과학자들은 경험적 증거에 직면하여 자신의 생각을 바꿀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과학자들은 철학자나 신학자 양쪽 모두와 다르다. 실제 세계의 어떤 것도 칸트주의자의 생각을 바꿀 수 없을 것이며, 기독교신자 역시도 빵과 술의 안정성에 대한 어떤 경험적 증거에도 불구하고 신조를 바꾸지 않는다. 그러한 증거는 단순히 무관한 것으로 간주된다.[10]

과학의 다른 몇몇 특징들도 얘기될 필요가 있다. 예컨대 단순성과 통일성에 대한 추구 같은 것을 들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중요한 특징들을 열거할 것이다. 좋은 과학은 ― 좋은 철학, 좋은 종교와 마찬가지로 ― 누군가는 전문가적 진실성(integrity)이라고 묘사할 어떤 태도를 전제한다. 과학자는 자료를 속이거나 위조하면 안 되며, 앞뒤를 잘라 인용해도 안 되며, 지적으로 부정직한 어떤 다른 행동도 해서는 안 된다. 물론, 다 그렇듯이, 일부 개인들은 그러지 못한다. 그러나 전체로서의 과학은 그러한 행동을 인정하지 않는다. 실제로, 위반자가 발견되면, 그들은 보통 공동체에서 쫓겨난다. 과학은 사고의 영역에서의 정직성에 의존한다. 자신의 세금을 속일 수도 있다. 그러나 자료를 조작하면 안 된다.[11]

창조과학에 대해

창조과학은 앞의 절에서 열거된 과학의 기준을 어떻게 만족하는가? 이 맥락에서 “창조과학”이란 말을 통해, 나는 법률 590호에서의 정의뿐 아니라 그 명칭으로 얘기되는 모든 문헌을 지칭하려고 한다. 그 교리에는 우주가 매우 젊다(6000년에서 20000년)거나, 모든 것이 일순간에 시작했다거나, 인간은 유인원과 분리된 조상을 가진다거나, 한때 거대한 홍수가 전 지구를 뒤덮었었다는 주장들이 포함되어 있다.[12]

법칙―자연적 규칙성들

과학은 깨지지 않는 자연적 규칙성에 대한 것이다. 과학은 기적을 허용하지 않는다. 창조과학이 법칙 바깥의 일과 원인을 계속 언급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예컨대, 법률 590호로부터의 유일한 합리적은 추론(분명히 아칸소 법정에서 수용된 추론)은 창조과하에 따르면 우주와 생명의 기원은 법칙을 따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창조과학의 정의가 “무(無)로부터 우주, 에너지, 생명의 갑작스런 창조”라는 무제약적인 구절을 포함한다면, 진화의 정의는 특히 기원에 대한 자신의 관점이 “자연적”이라는 제약을 포함한다. “자연적”이란 “경험 법칙을 따르는”이란 뜻이기 때문에, 창조과학을 특징짓는 데 그런 용어를 의도적으로 생략했다는 것은 어떠한 법칙도 관련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추론의 입증을 위해, 우리는 창조과학자의 글에서 동일한 주장을 발견할 수 있다. 예컨대, 다음은 듀안 T. 기쉬(Duane T. Gish)의 대중서 󰡔진화―화석은 아니라고 말한다!󰡕(Evolution―The Fossils Say No!)의 한 구절이다.

창조. 창조란 말을 통해 우리는 기본적인 종류의 식물과 동물들이 창세기 첫 두 장에 묘사된 창조, 즉 갑작스런 과정 혹은 명령을 통해 존재하게 된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우리는 신에 의한 식물과 동물의 창조와 함께, 본질적으로 일순간인 과정을 이용하여 각각이 자기 자신의 종을 재생산하도록 명령받는 것을 보게 된다.
우리는 어떻게 창조했는지, 그가 어떤 과정을 사용했는지 알지 못한다. 왜냐하면 신은 자연적인 우주에서 현재는 어디서도 작동하지 않는 과정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이는 우리가 신성한 창조를 특별한 창조라고 일컫는 이유이다. 우리는 과학적 탐구를 통해 신에 의해 사용된 창조 과정에 대해 어떤 것도 발견할 수 없다.[13]

기쉬 스스로의 시인에 따르면, 우리는 과학을 다루고 있지 않다. 비슷한 생각은 존 휘트콤브 주니어(John Whitcomb, Jr.)와 헨리 M. 모리스(Henry N. Morris)의 󰡔창세기 홍수󰡕(The Genesis Flood)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창조의 기간 동안, 신은 매우 고도의 질서와 체계와 에너지를 우주에, 그리고 생명 그 자체에도 도입하고 있었다! 따라서 신이 창조에 사용한 과정이 우주에서 현재 작동하는 과정과 완전히 다르다는 것은 매우 분명하다! 창조는 현재의 세계와 완전히 공약불가능한 유일무이한 시기였다. 이는 신이 창조에 관하여 우리에게 던져준 신의 계시에서 강조되고 또 강조되는데, 이는 이런 말로 끝맺는다. ‘그리고 하늘과 땅은 마무리되었고, 그의 모든 일이 마무리되었다. 그리고 7번째 날 신은 그가 할당한 일을 마무리했다. 그리고 7번째 날에 그는 그가 할당한 그의 모든 일을 쉬었다. 그리고 신은 7번째 날을 축복하고 신성한 날로 만들었다. 왜냐하면 그날 그는 신이 창조하고 할당한 그의 모든 일을 쉬었기 때문이다.’ 이 강하고 반복되는 주장의 관점에서, 인간이 창조를 현재의 과정으로 연구하려고 하는 것은 주제넘음의 극치가 아닐까?[14]

창조과학자들은 대부분 이 작품을 창조과학 운동의 성장을 주도한 매우 중대한 작품으로 인정한다. 특히 모리스는 창조과학의 아버지 같은 존재이며, 기쉬는 그의 왼팔이다.

창조과학자들은 다른 많은 사례에서도 법칙을 깨뜨린다. 창조과학자들은 예컨대 대홍수가 맹목적인 규칙성에 따라서는 일어날 수 없었다고 믿는다. 휘트콤브와 모리스가 분명히 밝힌 바에 따르면, 대홍수가 일어나는 데에는 어떤 초자연적인 개입이 필요했다.[15] 마찬가지로, 적어도 일부 생명체의 생존을 보장하기 위해서, 신은 분주하게 움직이며 법칙을 깨뜨려야 했다.

설명과 예측

이러한 과정에서 과학자들에 있어 법칙이 수행하는 중대한 역할로 볼 때, 법칙 없이는 설명도 예측도 불가능하다. 따라서 누군가 기원이나 대홍수에 대한 창조과학적 기술을 한다면, 설명과 예측은 단순히 시도조차 불가능하다.

생물학의 더 넓은 전망에 비추어 보아도, 창조과학은 부적절하다. 과학적 설명/예측은 왜 그 일이 일어나고, 다른 일이 일어나지 않았는지를 보임으로써 일이 설명/예측되도록 해야 한다. 왜 공은 포물선으로 움직이는가? 왜 그것은 원을 그리지 않는가? 중요하면서도 만연한 생물학적 현상 하나, 이를테면 “상동 관계”(homologies), 즉 다른 동물들의 뼈 사이의 동형성을 생각해보자. 이 유사성은 다윈이 󰡔종의 기원󰡕(On the Origin of Species)을 발표하기 전에도 자연의 만연한 특징으로 인식되었다. 사람, 말, 고래, 새의 앞다리의 뼈들은 모두 기능이 무척이나 다름에도 불구하고 왜 그렇게 비슷한가? 진화론자들은 상동 관계를 공통 조상의 결과로 자연스럽고 쉽게 설명한다. 창조론자들은 아무런 설명도 아무런 예측도 하지 못한다. 그들이 제공할 수 있는 것이라곤 분류란 모두 인간이 만든 자의적인 것이기 때문에 상동 관계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솔직하지 못한 말뿐이다. 인간이 새와 함께 분류되지 않는 것이 자의적인가?[16] 왜 다윈의 핀치들은 우리가 갈라파고스에서 발견되는 방식으로 분포되어 있는가? 왜 이 작은 새의 14가지 구분되는 종들이 적도 부군의 태평양의 작은 군도에 흩어져 있는 것일까? 드문 일이지만 다윈의 핀치들이 창조과학의 페이지로 정말로 날아 들어갈 경우, 그들은 모두 같은 종이거나(거짓), 그들이 생명의 시작점에 창조된 하나의 “종류(kind)”으로부터 퇴화한 경우로 얘기된다.[17] “종류”란 말이 창세기에서 유일하게 발견되는 분류 용어라는 사실을 제외하면, 이는 아무런 설명도 아니다. 어떻게 그러한 핀치들의 구분이 창조론자들이 창조 이후 허용하는 그 짧은 시간 동안 생겨날 수 있었는가? 게다가 어떤 일이 있어도, 다윈의 핀치들은 퇴화가 절대 아니다. 핀치의 서로 다른 종들은 완전히 다른 종류의 부리를 가지고 있으며, 그 부리들은 서로 다른 먹이감에 적응되어 있다. 이는 가장 복잡한 종류의 진화이다.[18]

시험가능성, 입증, 반증가능성

시험가능성, 입증, 반증가능성은 창조과학에서 잘 다루지 못한다. 과학 이론은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것에 대한 단지 사후 설명 이상을 제공해야 한다. 과학자는 새로운 지식의 최전선으로 밀어 붙여야 한다. 이를 위해 그는 새로운 사실을 예측하려고 애쓰고, 반증해줄 수도 있는 정보가 발견될 수 있는 위험에 이론을 노출시킨다. 과학자는 위협으로부터 자신의 견해를 끊임없이 방어하면서, 즉 자신의 핵심 가정을 구제하기 위해 임시방편적인(ad hoc) 가설들을 영원히 발명하면서, 이차적인 수준에서만 작업할 수는 없다.

창조과학즈들은 진정한 시험의 방법을 통해서는 조금도 혹은 아무것도 일을 하지 않는다. 실제로, 창조과학 문헌의 대부분에서 나타나는 매우 두드러진 점은 창조과학자들에 의해 수행된 어떠한 실험적 혹은 관찰적 작업이 사실상 거의 없다는 것이다. 거의 변함없이, 창조과학자들은 진화론자들의 발견과 주장에 대해서만 다루며, 그 결론을 자신들의 목적에 맞게 뒤트는 일만 한다. 그들의 논변은 창조론이 맞다는 것을 보이기보다는 진화론(특히 다윈주의)이 틀렸다는 것을 보이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그러나 이러한 진행 방식―창조과학자들이 “두 모형 접근”이라 부르는 것―은 단순히 잘못된 형태의 논변일 뿐이다. 생명이 우주로부터 왔다고 믿는 프레드 호일(Fred Hoyle)과 N. C. 위크라마싱(N. C. Wickramasinghe)와 같은 사람들의 견해는 창조론도 진정한 진화론도 아니다.[19] 진화론에 대한 부정은 창조론을 증명하지 않는다. 그리고 진화론이나 창조론 중 하나만 맞다고 하더라도, 영원히 부정적인 접근은 과학이 수행되는 방식이 아니다. 그들은 물리학자, 화학자, 생물학자가 하는 것처럼 자신의 입장을 뒷받침하는 자기 자신의 증거를 찾아야 한다.

창조과학자들은 자신의 이론과 생각을 실제로 시험에 노출시킨 적이 한번이라도 있는가? 그렇다 하더라도, 새로운 반대되는 경험적 증거가 발견될 때, 창조과학자들은 후퇴하여 자신들의 입장이 반증되었다는 것을 인정하길 거부하는 것 같다. 예컨대, “잃어버린 고리”―이를테면, 인간과 그 조상 사이의 고리―의 고전적인 사례를 생각해보자. 창조과학자들은 그럴듯한 중간 생명체가 전혀 없다고 말한다. 따라서 인간과 다른 동물들(살았든 죽었든) 사이의 이 엄청난 간극은 인간과 유인원이 다른 조상을 가진다는 창조론자들의 주장을 강화시켜주는 것 같다. 그러나 고생물학자들이 그럴법한 인간의 조상이라고 현 세기 내내 주장해온 오스트랄로피테쿠스는 어떤가? 이에 대해, 창조론자들은 오스트랄로피테쿠스는 연결고리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유인원 같은 뇌를 가졌고, 그들은 유인원처럼 걸었으며, 그들은 그저 고릴라처럼 손가락 관절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간극은 여전히 존재한다.[20]

그러나 이런 결론은 경험적 증거에 대한 노골적인 무시를 통해서만 유지될 수 있다.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파렌시스(Australopithecus afarensis)는 유인원 크기의 뇌를 가진 직립보행을 하는 생명체였다.[21] 그러나 창조론자들은 패배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들은 이제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파렌시스가 오랑우탄 같다고 주장한다.[22] 짧게 말해, 분명 어떤 것도 창조론자들의 생각을 바꾸지 못하며, 아니면 반증이 될까봐 자신의 견해를 시험에 부치지도 않는다.

잠정성

창조과학은 창조론자들이 자신의 입장에서 전혀 꼼작할 수 없기 때문에 과학이 아니다. 실제로, 창조과학의 주도적인 단체인 창조연구회(The Creation Research Society : 500명의 정회원으로 구성되었으며, 모두 과학/기술 영역의 고급 학위를 가져야 한다)는 자신의 회원들에게 성서를 문자 그대로 참인 것으로 받아들인다는 맹세에 사인을 하도록 요구한다.[23] 불행히도, 과학 단체라 주장하려면, 그 단체는 그러한 회원 자격을 요구할 수 없다. 과학은 변화에 열려 있어야 하지만, 현재는 자신감을 가질 수 있다. 광적인 독단주의는 정말 허용될 수 없다.

진실성(Integrity)

창조과학자들은 자신들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논리학 책에 등장하는 온갖 오류를 사용한다. 특히, 진화론자들의 입장을 엄청나게 왜곡할 뿐 아니라, 창조과학자들은 부적절하거나 혹은 불완전한 인용을 자주 사용한다. 그들은 몇몇 저명한 진화론자의 말을 가져와서, 원래 의도의 정확히 반대를 그가 말한 것처럼 만들어 버린다. 예를 들어, 창조: 생명의 사실들(Creation: The Facts of Life)에서, 저자 개리 E. 파커(Gary E. Parker)는 “저명한 하버드 유전학자” 리처드 르원틴을 지속적으로 참조하면서, 마치 손과 눈이 신에 의한 설계의 가장 좋은 증거라고 그가 주장한 것처럼 만들었다.[24] 이러한 참조가 정말 사실일 수 있는가? 진화적 변화의 유전적 기초(The Genetic Basis of Evolutionary Change)[25]의 저자는 정말 다윈을 버리고 모세를 택했는가? 사실, 르원틴의 책을 보면, 그가 다윈 이전에는 사람들이 손과 눈을 직접적인 설계의 결과로 믿었다고 얘기한 것을 볼 수 있다. 오늘날, 과학자들은 그러한 형질들이 자연 선택에 의한 진화의 자연적 과정에 의해 산출된다고 믿는다. 그러나 파커의 책을 통해서는 이에 대해 아무것도 배울 수 없다.

과학의 본질적 특징들은 무엇인가? 창조과학은 이 특징들을 모두 가지고 있는가, 아니면 하나라도 가지고 있는가, 아니면 전혀 가지고 있지 않은가? 나의 대답은 전혀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과학을 구성하는 어떠한 표식에 대해서도, 창조과학은 실패한다. 창조과학의 진정한 본성을 보이는 것이 나의 직접적인 목적은 아니었지만, 누구나 그것을 분명히 볼 수 있게 되었다. 개입하는 통치자의 힘에 의해 일어난 기적은 오직 한 가지를 말해준다. 창조 “과학”은 사실은 독단적인 종교 근본주의이다. 그것을 그 외의 것으로 간주하는 것은 과학자에 대한 모욕이며, 창조과학을 신이 부여한 이성에 대한 불경스런 왜곡으로 보는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의 모욕이다. 나는 창조과학이 공립 학교에서 가르쳐져서는 안 된다고 믿는다. 왜냐하면 창조과학은 과학이 아니기 때문이다.

주석

  1. 사실, 법률 590호는 만약 누군가 진화를 가르치겠다면, 그는 반드시 창조과학도 가르쳐야 한다고 요구했다. 아마 교사는 기원으로부터 완전히 멀어지게 되었을 것이다. 몇몇 수업과의 큰 간극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2. 나의 경험에 대한 개인적인 짧은 이야기는 다음을 보라. Michael Ruse, “A Philosopher at the Monkey Trial,” New Scientist (1982): 317-319.
  3. 법률 590호의 합헌성(혹은 위헌성)에 대한 윌리엄 오버톤 판사의 판결은 (종교사가들과 종교사회학자들을 포함한) 신학자들과 과학자들에 의해 제기된 다양한 주장들에 대한 공정하고 완전한 기술을 제공한다.
  4. 나의 책 The Darwinian Revolution: Science Red in Tooth and Claw (Chicago, IL: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79)에서, 나는 19세기에 과학이 종교와 떨어지는 방식을 살펴보았다.
  5. 다음은 과학철학의 여러 기초적인 문헌들 중에서 뽑은 것이다. R. B. Braithwaite, Scientific Explanation (Cambridge, England: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53); Karl Popper, The Logic of Scientific Discovery (London: Hutchinson, 1959); E. Nagel, The Structure of Science (London: Routledge and Kegan Paul, 1961); Thomas S. Kuhn, The Structure of Scientific Revolutions (Chicago, IL: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62); C. G. Gempel, Philosophy of Natural Science (Engelwood Cliffs, NJ: Prentice-Hall, 1966). 이 논의는 내가 여러 입장을 가진 고소인들에게 제공한 것과 동일하다. 이는 또한 나의 법정 증언의 기초를 형성했으며, 오버톤 판사의 판결에서 볼 수 있듯이 사실상 글자 그대로 법정에서 받아들여졌다.
  6. 때로 어떤 학자들은 “이론”과 “모형”을 구분하기도 한다. 이 논의의 수준에서, 구체적인 세부사항을 검토할 필요는 없다. 나는 이 용어들의 다양한 사용에 대해 나의 책 Darwinism Defended: A Guide to the Evolution Controversies (Reading, MA: Addison-Wesley, 1982)에서 검토한 바 있다.
  7. 과학과 기적에 대한 더 많은 얘기는, 특히 진화론적 질문에 관련해서는, 앞에서 언급했던 나의 Darwinian Revolution을 보라.
  8. 생물학에서의 설명에 대한 더 많은 사항은 다음을 보라. Michael Ruse, Philosophy of Biology (London: Hutchinson, 1973); David L. Hull, Philosophy of Biological Science (Englewood Cliffs, NJ: Prentice-Hall, 1974). 유명한 주장은 법칙에 대한 설명은 다른 법칙으로부터의 도출을 동반한다. 이론은 이런 방식으로 묶인 법칙들의 덩어리로, 소위 “가설연역”(hypothetico-deductive) 체계이다.
  9. 이 점에 대한 더 많은 얘기는 나의 Is Science Sexist? And Other Problem in the Biomedical Sciences (Dordrecht, Holland: D. Reidel Publishing Company, 1981)을 보라.
  10. 아칸소 재판에서, 과학의 잠정성에 대해 말하면서, 나는 과학과 법 사이의 증언의 유사성을 끌어들였다. 범죄 재판에서, 누군가는 “합리적 의심을 넘어서는” 유죄를 확립하기 위해 노력한다. 만약 이것이 성공한다면, 범죄는 유죄를 선고받는다. 그러나 유죄를 선고받은 사람이 결백하다는 새로운 증거가 언젠가 발견된다면, 재판은 언제나 다시 열릴 수 있다. 과학에서도 마찬가지로, 과학자들은 less formally but just as strongly 결정을 내리고서 일에 열중하지만, 그러나 재판(이론)은 다시 열릴 수 있다.
  11. 물론, 과학자는 시민과 마찬가지로 여기서 문제를 겪을 수 있다.
  12. 공립 학교에서의 “공평한 대우”를 요구한 아칸소 법률 590호에서의 핵심 정의는 [법률]의 4절에 나타난다. 4(a)절은 지구의 나이가 정확히 얼마나 되는지 명시하지 않았지만, 법정에서는 6000년에서 20000년 사이라는 증언이 나왔다. 창조과학의 가장 완전한 입장은 Henry M. Morris, ed., Scientific Creationism San Diego, CA: Creation-Life Publishers, 1974)에서 볼 수 있다.
  13. Duane T. Gish, Evolution―The Fossils Say No! (San Diego, CA: Creation-Life Publishers, 1973), pp. 22-25, 강조는 저자의 것.
  14. John Whitcomb, Jr., and Henry M. Morris, The Genesis Flood (Philadelphia, PA: Presbyterian and Reformed Publishing Company, 1961), pp. 223-224, 강조는 저자의 것.
  15. Ibid, p. 76.
  16. Morris, op. cit., pp. 71-72와 Darwinian Defended, op. cit.에 나온 나의 논의를 보라.
  17. 예컨대, John N. Moore and H. S. Slusher, Biology: A Search for Order in Complexity (Grand Rapids, MI: Zondervan, 1977)에 있다.
  18. D. Lack, Darwin’s Finches (Cambridge, England: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47).
  19. Fred Hoyle and N. C. Wickramasinghe, Evolution from Space (London: Dent, 1981).
  20. Morris, op. cit., p. 173.
  21. Donald Johanson and M. Edey, Lucy: The Beginnings of Humankind (New York, NY: Simon and Schuster, 1981).
  22. Gary E. Parker, Creation: The Facts of Life (San Diego, CA: Creation-Life Publishers, 1979), p. 113.
  23. 이 선언서의 구체적인 내용은 오버톤 판사의 판결문 각주 7번을 보라.
  24. Parker, op. cit.. 예컨대 55쪽과 144쪽을 보라. 후자의 구절은 모두 인용할 가치가 있다.
    그러면 ‘환경에 대한 생명체들의 놀라운 어울림’, 청소부 물고기, 딱따구리, 가는목먼지벌레 등등의 특수한 적응들―다윈이 ‘이론의 어려움’이라고 부른 것이면서, 르원틴(1978)이 ‘최고 설계자의 주된 증거’라고 이 있는 것―이다. 이들의 ‘구조의 완벽함’ 때문에, 그는 생명체가 ‘조심스럽게 인위적으로 설계된 것처럼 보인다’고 말한다.
    여기에 언급된 리처드 르원틴의 글은 “Adaptation,” Scientific American (September 1978)이다.
  25. Richard C. Lewontin, The Genetic Basis of Evolutionary Change (New York, NY: Columbia University Press, 19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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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획 문제

어떤 분야나 이론이 사이비과학인지를 확인하는 아주 효과적인 방법이 있기는 있다. 그들의 작업이 보통 전문저널이 아닌 책으로 출판된다든가, NSF나 NAS의 지원을 받지 못한다든가 하는 것을 보고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이론이나 연구활동이 사이비과학으로 간주되는 근거에도 관심이 있다. 과학철학자들의 구획 문제라는 이름으로 관심을 가진 것은 바로 그것이다.

어떤 철학자들은 진짜 과학이 가진 필요조건을 제안했는데, 그 필요조건은 일종의 과학/사이비과학의 구획 기준으로 역할을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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