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sponse to the Commentary: Pro Judice
루스는 라우든의 비판이 재미있었으나 요점을 완전히 빗나갔다고 지적한다. 그는 오버튼 판사의 논증과 판단은 흠잡을 데가 없으며, 그가 '과학이 아니면 종교'라는 단순한 이분법에 따라 판결을 내린 것이 아님을 설명한다. 과학이 어떤 것인가라는 문제는 애초에 창조론자들이 그들의 견해를 진정한 과학이라고 주장했기 때문에 제기된 것이다. 재판에서 원고측은 창조과학이 진정한 과학이 아닌 종교라는 것에 대한 다양한 증거를 제시하는 데 성공했다. 또 라우든이 선호하는, 창조과학이 근거가 약한 과학이므로 교육해서는 안된다는 식의 전략은 법정에서 효력을 발휘하기 어렵다. 미국 헌법이 교육에서 금지하고 있는 것은 '근거가 약한 과학'이 아니라 '종교'이기 때문이다.
루스는 오버튼 판사의 5가지 기준[과학은 (1) 자연법칙을 따르고, (2) 자연법칙에 의한 설명이 이루어져야 하며, (3) 경험세계에 대해 시험가능하고, (4) 그 결론이 잠정적이며, (5)반증가능하다]이 아주 명쾌한 기준은 아니더라도 많은 경우 제 역할을 할 수 있으며, 창조과학의 경우가 그에 해당된다고 주장한다. 루스는 어떤 현상에 대해 법칙이 '아직' 밝혀지지 않은 경우와 법칙을 아예 무시하거나 알 수 없는 창조과학의 경우는 다르다고 말한다. 또 과학이 가진 어느 정도 독단성과 신념에 대한 서약을 하고서 그들 연구단체에 가입하는 창조과학의 독단성은 질적으로 다르다고 주장한다. 창조과학에 잠정성이 있다면(예컨대 창조론 내부에서도 태초에 창조된 종들의 변화 가능성에 대한 여러 주장이 존재한다), 그것은 그들이 유연하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들도 신이 인간을 창조했다는 것 외에는 아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요컨대 오버튼 판사의 5가지 기준은 과학과 비과학을 어느 정도 구분할 수 있으며, 창조과학은 그 기준을 통과하지 못하므로 명백히 비과학이다. 따라서 재판의 판결 사유는 정당했다.
요약
구획의 문제는 오랫동안 과학철학자들을 고심케 한 문제이다. 구획 기준이 포퍼의 제안만큼 단순하지는 않더라도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정신분석이론처럼 애매한 경우도 있지만 확연히 구분되는 경우도 있다. 눈 색에 대한 멘델의 유전법칙에 의한 설명과 빵과 포도주가 예수의 몸과 피로 변했다는 설명의 경우, 오버튼 판사가 제시한 다섯 가지 구획기준이 제 역할을 충실히 수행해낸다. 전자는 법칙과 법칙에 의한 설명을 포함하며, 시험가능하고, 경험적 증거에 따라 거부될 수 있으므로 잠정적이다. 반면 후자의 경우, 법칙이 존재하지 않거나 있더라도 신만이 알기 때문에 법칙에 의한 설명이 이루어지지 않으며, 어떠한 경험적 증거도 기적에는 해당되지 않고 또 그 신념을 바꾸게 하지도 않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후자의 주장은 잠정적이지 않다.
법칙과 설명의 문제
라우든은 과학자들도 항상 법칙에 의거하지는 않았다는 사실을 들어 반박했다. 예컨대, 찰스 라이엘은 지질학의 원리에서 인간의 도래에는 신의 특별한 개입이 필요했다는 암시를 던졌는데, 이는 분명히 과학의 법칙성을 벗어난 일이었지만 그의 전체적인 연구는 과학으로서 인정받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는 라이엘 자신이 과학과 비과학을 혼합한 경우로 보아야 한다. 일보 양보해서, 그당시 그런 형태의 연구를 과학이라 부를 수 있다 하더라도, 과학은 진화했고 오늘날의 과학은 더이상 법칙을 도외시하지 않는다. 물론, 우리가 모든 법칙을 다 알고 있다는 의미는 아니지만 말이다.
창조과학자들은 그들 스스로가 인간의 법칙을 가지고는 설명할 수 없는 현상들에 근거하고 있음을 인정한다. 이는 법칙이 아직 알려지지 않은 것과는 상황이 다르다. 창조 과정에서 신이 법칙을 사용했다고 하더라도, 성경에는 그에 대해 아무것도 쓰여있지 않으므로 우리가 그것을 알 방법은 영원히 없는 것이다.
과학의 독단성, 잠정성, 시험가능성의 문제
또 라우든은 실제로 과학이 그렇게 열려있지도 않다고 했다. 이것은 어느 정도 사실이지만 과장된 면이 있다. 경험적 증거가 완전히 결정적이지는 않더라도 과학자들의 태도 변화에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20세기 지질학 혁명은 해저 지각에 대한 새로운 경험적 증거가 밝혀지면서 일어났다. 과학은 포퍼의 생각만큼 열려있지는 않지만 쿤의 생각만큼 닫혀있지도 않다.
창조과학의 경우, 그들의 중심 주장은 잠정적이거나 경험적으로 확인가능하지도 않다. 그들은 자신의 연구단체(Creation Research Society)에 가입할 때 신념을 서약한다. 진화론자들이 다윈의 종의 기원에 대해 비슷한 종류의 서약을 하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다.
라우든은 창조과학의 어떤 부분은 반증가능하고(예. 대홍수 주장) 또 어떤 부분은 정정가능하다고(예: 태초에 만들어진 "종"에 대한 주장) 했다. 이것 역시 진정한 과학에서 나타나는 방식으로는 아니다. 사실상 그들이 대홍수에 대한 믿음을 철회할 방법은 없어 보인다. 또 창조과학에 가해지는 정정은 그들 입장의 모호함을 교묘하게 이용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창조론자들 사이에서 태초에 창조된 종들의 변화가능성에 대한 상충된 주장들이 존재하는 것은 창조과학이 유연하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들도 신이 인간을 창조했다는 것 외에는 아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주장하는 '종'의 정의조차 명확히 하지 못하고 있다. 창조론자들이 '종'을 다루는 모습은 과학자들에게서 기대되는 개방성과는 전혀 닮지 않았다.
관련 항목
구획 문제
- Karl Popper, Science: Conjectures and Refutations (번역)
- Thomas S. Kuhn, Logic of Discovery or Psychology of Research? (번역)
- Imre Lakatos, Science and Pseudoscience (번역)
- Paul R. Thagard, Why Astrology Is a Pseudoscience (번역)
- Michael Ruse, Creation-Science Is Not Science (번역)
- Larry Laudan, Commentary: Science at the Bar - Cause for Concern (번역)
- Michael Ruse, Response to the Commentary: Pro Judice
- David Resnik, "A Pragmatic Approach to the Demarcation Problems", Studies in History and Philosophy of Science 31 (2000): 249-267.
- Michael Ruse ed., But Is It Science?, Prometheus (19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