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과 문화의 상호 작용

작성자 : 조수남


이제 대부분의 사람들은 주변의 다양한 대중문화들을 통해 과학을 보다 손쉽게 접할 수 있게 되었다. 중요한 과학적 성과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신문이나 방송 혹은 잡지 등을 통해 대중들에게 전달되고, 의미 있는 과학적 주제들을 다룬 소설이나 영화, 그리고 다양한 공연 등을 발견하는 것도 어렵지 않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실험실이나 강의실에서라면 어렵고 복잡했을 과학을 보다 쉽고 흥미롭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됨은 물론이다.

서양 과학의 역사에서도 바로 그런 일을 어렵지 않게 발견하게 된다. 과학이 과학자의 연구실에서 벗어나 쉽게 접할 수 있는 책이나 기구, 그리고 강연 등을 통해 대중들에게 다가갔을 때 과학은 그 사회 속에서 더욱 분명히 각인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친숙해진 과학은 점점 더 사회의 중요한 일부분을 차지해나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렇듯 친숙하고 흥미로운 문화적인 경험을 통해 과학을 받아들이거나 접하게 될 때 자칫 문제가 나타나기도 했다. 가령 해당 사회에서 과학의 중요성이 더해감에 따라 과학에 대해 관심을 보이기는 했지만, 실제 과학의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려는 노력은 없이 그저 문화적 경험만을 추구하려는 경향도 없지 않았기 때문이다. 흥미를 불러일으킬 수 있을만한 실험 등에만 이목이 집중됨으로써 대중적인 관심이 증가하는 속에서도 실제 과학의 전반적인 이해는 부족했던 것도 문제였다. 또한 과장된 이미지나 은유 등에 가려 중요한 과학적 사실들이 제대로 전달되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제 서양 과학의 역사를 통해 과학과 문화의 다양한 상호 작용을 살펴봄으로써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 자세히 살펴보자.

인쇄술과 과학 문화의 시작

과학이 한 사회의 문화 속에서 뚜렷한 자리를 잡는 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던 사건을 하나 꼽으라면 단연 인쇄술의 발명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1440년 마인츠(Mainz)의 쿠텐베르크(Johannes Gutenberg)가 처음으로 기계화된 인쇄기를 발명한 이후, 서양에서는 곧바로 상업적인 인쇄소가 번성하기 시작했다. 이후 다양한 출판물들이 다량으로 인쇄되면서 서양에서는 조용히 지적인 혁명이 시작되었다. 한 때 일부 성직자들의 소유물로 한정되었던 성경이 인쇄기를 통해 다량 출판되었던 것과 전 유럽을 강타한 종교 개혁이 비슷한 시기에 일어났다는 것은 인쇄술이 서양 문명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는지를 단적으로 짐작하게 한다 할 것이다.

인쇄소가 성업을 이루면서 다른 서적과 더불어 과학 서적 및 논문의 출판 역시 크게 증가되었다. 만약 인쇄소가 발달하지 않았다면, 코페르니쿠스(Nicolaus Copernicus)의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On the Revolutions of the Celestial Spheres)』(1543)나 갈릴레오(Galileo Galilei)의 『별의 전령(Starry Messenger)』(1610) 및 『두 주된 세계 체계에 관한 대화(Dialogue Concerning the Two Chief World Systems)』(1632)와 같은 유명한 저술들이 빠른 시일 내에 전 유럽의 학자들에게 전달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또한 서적 출판이 원활하지 못했다면, 새로운 천문학이 서구 유럽 사회의 중요한 논쟁적 주제로 부상하기도 힘들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갈릴레오가 교황청에 불려가 '그래도 지구는 돈다'는 유명한 일화를 남기며 가택 연금에 처해지는 상황도 일어나지 않았을지 모른다. 따라서 역사가들은 인쇄술의 발전이 천문학 혁명을 가능하게 했던 중요한 배경을 마련했다고 설명한다.

하나의 문화적 상품이 되어버린 과학 기구

 
이탈리아 플로렌스에서 1588년부터 1593년 사이에 제작된 혼천의(armillary sphere)로 지름이 2미터42센티에 이르렀다.

지동설이라는 새로운 천문학의 발전은 당시 사람들의 하늘에 대한 생각을 완전히 뒤바꾼 혁명적인 사건이었다. 그 전까지는 지구는 흔들리지 않는 하늘의 중심이었고, 그 지구를 중심으로 모든 행성이나 별들이 회전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새로운 천문학적 발견을 통해 지구의 지위는 완전히 뒤바뀌었다. 여러 행성들과 마찬가지로 태양을 중심으로 회전하는 일개 행성에 불가하게 된 것이다. 사람들은 자연히 하늘 위에서의 지구의 위치 및 태양계의 운행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러면서 점차 전문 천문학자들의 기구였던 것이 상류층을 대상으로 상품화되기 시작했다. 재료나 화려한 장식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 이 기기들은 단순히 천문 관측의 목적을 넘어 하나의 사치품의 기능까지 담당하고 있었다.

 
16세기의 천문 컴펜디움

또한 16, 17세기에는 여러 천문 기구들을 함께 모아놓은 제품도 상업적으로 제작되었다. ‘천문 컴펜디움(astronomical compendium)’이 바로 그것인데, 접어서 휴대할 수 있는 기구로 달력, 나침반, 해시계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따라서 이 기구만 있으면 어디에서든 해당 지역에서의 일출과 일몰 시각, 그리고 주요 도시들의 위도 및 태양의 고도 계산 등 다양한 천문 관측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들 기구들의 외형은 매우 화려했고 실제 매우 값비싼 물건들이었다. 따라서 이 물건이 전문 천문학자들의 과학 기구로 사용되기보다는, 주로 이 물건을 가진 자의 재력 및 사회적 신분을 대변하는 상류층의 사치품으로 기능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당시 권력의 정점에 있던 군주들이나 재력 있는 상류층 귀족들은 하늘의 운행 및 그 이치에 관심이 많았다. 따라서 관측소 설립이나 관측 기구의 구입 등을 통해 천문학자나 수학자들을 후원하기도 했다. 그런 면에서 천문 컴펜디움은 하늘을 관측하는 도구를 자신의 수중에 넣고자 했던 이들의 욕망을 대변하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새로운 지식 문화, 과학

 
하벨리우스(Johannes Hevelius)가 만든 45미터짜리 망원경

근대 초에는 다양한 과학 기구들이 새롭게 등장하였고, 이것이 이전에는 알려지지 않았던 새로운 과학적 현상들을 보여주면서 단숨에 대중들의 관심을 사로잡기 시작했다. 하지만 초기 과학 기구들은 매우 귀했고 값비싼 물건이었으므로 개인이 소장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과학 기구를 중심으로 함께 모여 간접적으로나마 관측이나 실험 등을 경험하고자 하는 이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갈릴레오의 망원경은 대중들의 큰 관심을 모았던 과학 기구 가운데 하나였다. 망원경을 통해 직접 하늘의 별과 행성들을 관찰할 수 있다는 것은 그 자체로 놀라운 사건이었다. 따라서 망원경 관측이 이루어질 때면 많은 사람들이 망원경 주위에 모여들었다. 망원경이 인기를 끌면서 더 좋은 배율의 망원경을 만들려는 과정에서 망원경의 길이는 점점 더 늘어나기 시작했다. 물론 그 길이만큼 성능이 월등히 향상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거대한 망원경은 그 외관 덕분에 더욱더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이후 뉴턴의 『프린키피아』로 대변되는 근대 과학 혁명의 여러 성과들을 통해 과학에 대한 사회적 관심은 폭 넓게 증가되었다. 특히 힘과 운동에 관해 다루는 역학의 여러 성과들은 과학이 전문적인 학자들에게만이 아니라 실제 일에 종사하는 이들에게도 유용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이 과정에서 대중들의 지적 욕구에 부응하여 강연장을 돌아다니면서 직접 실험을 진행하고 과학 강연을 하는 순회 강연가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나중에는 전문적인 과학자들까지 가세하여 직접 실험 강연을 진행하기도 했다. 이러한 대중 강연 및 실험 재현을 통해 과학이 보다 흥미롭고 유용한 것이 되어 갔음은 물론이다.

과학에 무지한 대중들에게 과학을 전달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주로 과학 기구나 실험을 이용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들의 강연은 주로 수리 과학 분야보다는 과학 기구들을 활용할 수 있는 실험 과학 분야들에 집중되었다. 강연 주제의 선택 역시 그것의 과학적인 가치나 의의보다 얼마나 대중의 흥미와 관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느냐에 따라 좌우되었다.

한편 과학 강연이 지식 대중의 관심을 끌면서 점차 지방으로까지 확산되었고, 이 과정에서 과학 강연 자체가 중요한 지적 여가 문화로, 동시에 사교의 장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따라서 과학에 관심이 없거나 굳이 과학적 지식이 필요하지 않은 사람들조차도 주류 문화로부터 소외되지 않기 위해 강연장을 찾는 일이 빈번했다.

대중 저널 속의 과학, 이미지에 갇혀버린 과학

 
다윈의 《인간의 유래(The Descent of Men)》가 나온 1871년 주간지(Harper's Weekly)에 실린 카툰. 고릴라가 “저 사람이 내 혈통임을 주장하고 싶어 해요. 자기가 내 후손 중 한 사람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어요”라며 흐느끼자, ‘동물 학대 방지를 위한 협회의 창설자인 버그씨(Mr. Bergh)가 “다윈씨, 어떻게 그를 그토록 모욕할 수가 있소?”라고 대답하고 있다.

19세기를 지나면서 신문이나 대중 잡지, 그리고 서평지 등의 출판물의 인쇄가 급격하게 증가되었다. 이는 이 시기 대중들의 지적 욕구를 반영하는 것이기도 했는데, 과학 역시 그 출판물들의 주요 주제 가운데 하나였다. 이 시기 과학자가 책을 펴내거나 강의를 하게 되면 대개 곧바로 저널이나 잡지 등에 소개되었다. 특히 그것이 논쟁적인 주제를 담고 있을 경우 신랄한 설전으로 이어지기도 했는데, 19세기 중․후반의 가장 대표적인 주제는 뭐니 뭐니 해도 '진화론'에 대한 논쟁이라 할 것이다.

 
다윈을 원숭이로 풍자한 1880년대의 프랑스 풍자 잡지(La Petite Lune)

진화론 논쟁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논쟁에서 중요한 과학적 이론 및 관찰 자료 등이 객관적으로 평가되기보다는 원숭이나 고릴라의 이미지를 통해 논쟁이 희화화되고 단순화되었다는 점일 것이다. 이 시기 다윈의 진화론을 다루는 출판물에서 항상 원숭이나 고릴라가 등장하는 것은 다윈의 진화론에 대한 우회적인 비판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영국 과학 진흥회(British Association for the Advancement of Science)의 모임에서 이루어진 헉슬리와 윌버포스의 논쟁은 유명하다. 윌버포스경이 “원숭이가 조상이라면 당신은 할머니로부터 물려받은 것인가 아니면 할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것인가?”라고 공격했을 때 헉슬리가 “나는 진실을 대하기를 두려워하는 사람이 되기보다 차라리 두 원숭이의 자손이 되는 편이 낫겠소”라고 했다는 것은 유명한 일화다.

결론

이제 과학은 과학자의 서재나 실험실을 벗어나 우리 사회의 다양한 문화 속의 한 축이 되었다. 과학은 문화라는 매개체를 통해 대중들에게 더 쉽고 흥미롭게 나아갈 수 있다. 또한 과학이 점점 더 사회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해가면서 과학적 주제를 선택했다는 사실 자체가 특정 문화적 경험을 좀 더 유혹적인 것으로 만들어 놓기도 한다.

하지만 앞에서도 살펴보았듯이, 과학과 문화와의 상호 작용은 매우 다양한 형태로 나타날 수 있으며, 그 과정에서 때로는 다양한 부작용 역시 나타날 수 있다. 그렇다면 과학이 이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변화 발전해나가는 상황에서 과학과 문화 간의 원활하고 긍정적인 상호 작용을 위해서는 무엇이 전제되어야 할까? 우선 다양한 문화를 통해 과학을 보다 쉽고 흥미롭게 전달하면서도 진실되고 객관적인 시각을 견지할 줄 아는 과학인이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사회 속에서 큰 의미를 지니는 과학이라면, 우리 스스로가 과학에 관심을 지녀 문화 속에 나타난 과학의 모습을 제대로 바라보고 비판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과학과 문화 간의 상호작용이 더욱 원만해질 때 우리의 삶 역시 더 풍요로워질 것이다.

더 읽을거리

과학의 역사와 문화」, 『과학교양』 (과학중점고등학교 교과서). 한국과학창의재단, 2010.

  1. 17세기 과학혁명의 지적, 사회적 의미 (김봉국)
  2. 18세기 라부아지에와 화학연구의 새로운 방법 (오승현)
  3. 19세기 물리학의 탄생 (정동욱)
  4. 19세기 다윈주의 진화론의 등장과 그 사회적 함의 (정세권)
  5. 20세기 유전학: 멘델에서 인간게놈프로젝트까지 (정성욱)
  6. 과학의 제도적 기반 (정동욱)
  7. 과학과 문화의 상호 작용 (조수남)
  8. 산업혁명을 통해 본 과학과 기술의 상호작용 (서민우)
  9. 과학과 제국주의 (정세권)
  10. 과학과 여성 (박민아)